책향기

기나긴 하루 - 박완서

구름뜰 2012. 1. 30. 09:32

이 세상에는 내가 시간을 살리고 시간이 나를 살리는 일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박완서 선생의 소설을 읽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중의 하나다. - 정서의 연금술과 천의무봉의 서술과 칼날 같은 통찰력이, 어김없이, 있다. 소설 읽기가 심드렁해질 때마다 박완서라는 소설의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읽어나갈 힘을 얻은 경험이 비평하는 이들에게는 더러 있다.

-해설 부분. 신형철.. 

 

 

 

박완서 선생님 1주기 기념 신간이 나왔다.

한국의 작가들 특히 여성작가들에게 선생님만큼 사랑받은 작가가 또 있을까.

글쓰는 이들에겐 그어떤 분 보다 톱 롤모델이지 않았을까 

당신이 보여준 그 많은 이야기들 인생은 잛고 예술이 긴 이유를

이렇게 고인이 되시고도  유작으로 증명해주신다.

 

 

선생님 소설의 특징은 소설인줄 알고 읽는데도 산문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대체로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은

스토리의 개연성에 몰입이 잘 되지 않아서인데

그건 작품의 구성이나 작가에 대한, 등등의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선생님의 소설은 그 반대상황이 되는 것이다.

 

자전적인 이야기에 약간의 리얼이티만 가미한 것 같은

어떤 작품이든  화자는 언제나 '박완서'가 되어 있는 소설들,

이것 소설맞지라고 한번 더 생각하게 되는  그 숱한  이야기들.

 그만큼 허구에도 치밀했던, 까발리면 까발릴수록 불합리한 합리에 정작

연민케 했던 그 진정성있는 얼개와 현학적이면서 탁월한 어휘선택까지.

어떤 문장에서도 어떤 소재에서도 서슬퍼런 인식이 보였고 

그 인식이 독자들에게 가장 큰 선물이었던 작품들이다.

 

 

<기나긴 하루>는 이달 20일에 초판 발행된 책이다. 신작3편과 대표작 3편이 함께 실려있다.  

신작 :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현대문학 2010년 10월,

          <빨갱이 바이러스> 문학동네 2009년 가을,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문학의 문학 2008년 가을

대표작 : <카메라와 워커> 한국문학 ,1975년 2월 - 박완서와 관악산 - 김윤식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상상, 1993년 창간호  - 박완서 선생님 보셔요 - 신경숙.

             <닮은 방들> 월간 중앙 1974년 6월 - 말(言) 주변에서, 말주변 찾기 - 김애란

대표작은 각각 김윤식, 신경숙, 김애란 님들의 추천이유와 선생님에 대한 개인적 술회와 작품에 대한 평들이 함께 실려 있다.

 

 

2010년 쓴 마지막 소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일부분을 발췌했다.

 마지막 소설이 '자전소설' 형식으로 쓴것이라는것과 제목까지 

당신이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하고싶었던 말씀들을 오롯이 담아 놓으신 것 같다.

이미 많은 소설과 산문에서 상세하게 재현된 바 있지만 팔십여 년 일생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단편의 분량안에 아름답게 갈무리되어 있다.

 

 

 

 

 자수성가한 한 남자한데 시집가서 국민소득이 오르는 것만큼 살림을 향상시켜가며 풍파 없이 평균치의 삶을 유지해왔다.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는데 내가 다산성 체질인 탓도 있지만 전쟁중에 결혼해서 전후에 첫애를 낳고 막내를 낳은 것이 1963년이었으니 정학하게 베이비붐 시기에 해당한다.

-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집에 잔손 갈 일이 없어지자 비로소 이제부터라도 엄두를 내야 할 것 같은 엄청난 욕구가 내안에 있다는 걸 느꼈다. 그 걷잡을 수 없는 욕구는 증언의 욕구였다. 6,25때 오빠하고, 끝내 자기 자식을 두지 못해 나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었던 삼촌이 비참하게 죽었다. 남들이 다 남쪽으로 피난가 있는 동안 남아 있던 우리 식구들은 강제로 찢기고 일부는 북으로 끌려가야 하는 고난을 겪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인들 안 당했겠는가.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 왜 하필 소설이었을까. 소설로 어떻게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다.

 

 

 

 세상도 나도 그때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를 다독이고 가난을 딛고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현실에만 충실했다. - 그런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중간쯤을 달려온 중산층적인 삶에 안주해 있던 나에게 느닷없이 엄습해온 그 엄청난 욕구는 신선한 충격이자 이물감이었다. 내가 누려온 안일이 한없이 누추하게 여겨졌다. 사람이란 고통받을 때만 의지할 힘이나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에도 위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증언의 욕구가 이십 년 동안이나 뜸을 들였다가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아마도 최초의 욕구가 증오와 복수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이 써지지 않은다. 우리 가족만 당한 것 같은 인명피해 나만 만난 것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나만 겪은 것 같은 극빈의 고통이 실은 동족상잔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훗날 나타난 통계숫자만 봐도 그렇다. 우린 특별히 운이 나빴던 것도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 끔찍한 전쟁에서 평균치의 화를 입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이 복수나 고발을 위한 글쓰기의 욕망을 식혀주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식지 않고 날로 깊어지는 건 사랑이었다. 내 붙이의 죽음을 몇백만 명의 희생자 중의 하나, 곧 몇백만 분의 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집 창밖을 지나는 무수한 발소리 중에서도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몇백, 몇천 명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운동장에 모여 있어도 그 안에서 내 자식을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내 자식이 딴 애들보다 덜 똘방똘방하고 어리숙해 보일수록 사무치게 사랑스러운 것처럼.

 

 

 마흔 살이란 늦은 나이답게 수줍게 문단을 두드린 게 처녀작 <나목>이었다. 사적인 경험을 우려낸 작품이나 유니크하지만 등단작으로 끝나는 일회적인 작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한 심사위원의 조심스러운 전망이 기억에 남는다. 그분의 우려가 격려가 되어 그후 나는 열심히 글을 썼고 문단과 독자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아 종종 인기작가 소리도 듣게 되었다. 초기에 쏟아낸 6.25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 대해선 비극적인 가족사를 반복적으로 우려먹는다는 평도 들었지만 나는 반전소설로 읽히길 바라고 있다. 유연하게 성공적으로 가정주부에서 작가로 변신할 수 있었고, 그후의 작가생활도 결혼생활처럼 풍파없이 순탄했다.

 

 

 

 

 88올림픽으로 온 국민이 활기와 환희, 새로운 희망과 자신감으로 의기충전해 있을 때, 그 한해 동안에 나는 남편과 아들을 석 달 간격으로 잃었다. 남편이 먼저였다. 우린 남들이 부러워한 금슬 좋은 부부였고, 특히 나는 생활인으로 결격사항이 많은 사람이라 전적으로 의존적이었다. 다행히 네딸을 시집보낸 뒤였고, 막내도 아들 하나만 미혼이었지만 그 아들도 제 앞가림은 하고도 남을 만한 전문직으로 키워놨겠다.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혼자서 살 자신도 없었다. 극도의 무력감은 슬픔보다 더 나빴다. 아들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전혀 신셩 안 쓰고 남편의 영정을 머리맡에 두고, 여보 나 좀 데려가줘요. 하는 소리만 주문처럼 외고 살았다. 그런지 석 달 만에 남편이 데려간 건 내가 아니라 아들이었다. 나는 겁 없이 그런 주문을 왼 내 입술을 짓찢어도 시원치가 않았고 내 소원에 그런 어깃장으로 답한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 당장 영정사진을 치워버렸다. 이럴 리가 없다. 제발 꿈이어라. 방을 헤매며 온몸을 벽에 부딪치는 난동도 부려보았지만 악몽은 깨어나지지 않았다. 슬픔보다 더 견딜 수없는 건 수치심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습니까. 라는 신에 대한 원망은 곧 사람들이 저 여자는 뭘 잘못했기에 그 외아들 하나 지니지 못했나, 하는 수군거림이 되어 나에게로 되돌아 왔다. 친지들의 정중한 조문의 말도 그런 비아냥거림을 포장한 말로 들렸다. 사람을 만나기 싫어 딸네 집에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숨어 있어도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었다. 혼자 있으면 하늘이 부끄럽고 땅이 부끄러웠다. 차라리 하느님과 정면대결을 하려고 수녀원에 들어가 독방 차지를 하고 있어도 보았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벌을 주셨나 항의도 해보고, 나도 아들곁으로 데려가달라고 처절하게 기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내 절규는 하느님의 견고한 침묵의 변죽도 울리지 못했따. 그래도 그때 하느님과의 일 대 일 대결에서 깨달은 게 있다면 피조물은 길든 짧든 창조주가 정해준 수명에서 일 초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깨달음은 질책보다 더 엄혹했다.

-2010년 2월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중에서 

 

 

서울대 의대생이던 아들의 인턴시절,

가망 없는 환자가 집에서 임종을 맞고싶어해 제주도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집으로 가는  동안 환자의 숨이 끊어지지 않도록 동승하고

그 임종을 정리하고 돌아온 길,말단의 의사에게 시킬법한 일이었지만,

처음으로 맡겨진 일이 임종을 도와주는 일이었다는게 아들을 우울하게 한 것 같았다.

 아쉬운 듯이 아들은,

"엄마 내가 처음 타본 비행기였는데.... "

그때는 그냥 웃어넘기고 만 일이 이제 와서 이 아름다운 아말피 해안도로 상에서

오열을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스물여섯 살까지 비행기 한 번 못타보다니, 시대가 그랬던 것이다.

 

여행중은 파바로티의 음악에 취했다가 불현듯 생각난 아들생각에 오열했던 모습이다.

 

 

 

 

(대표작 세 편은 각각 한국전쟁에서부터 개발독재 시대로 이어지는 어떤 욕망의 뿌리를, 산업화와 더불어 도래한 대중사회가 지핀 병리적인 욕망의 메커니즘을, 민주화 시대의 숭고한 희생들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복구불가의 상처를 그린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 동안 우리가 살아내야 했던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도려낸 사례들이다. 역사는 세상의 길 위에서도 흐르지만 인간의 마음속에서도 흐른다. 이 마음의 역사를 소설가가 아니면 누가 기록할 것인가.

-결국 훌륭한 소설은 이 세상에는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소설이다. 사십여 년의 세월이 그 줄기찬 입증의 과정이었고, 그 입증의 성공은 소설가로서 선생이 늘 품고 있었던 자부심의 근거였다. 그럴수 있기 위해 늘 견지해야 했던 작가로서의 긴장을 말년의 단편들에서도 여전히 목격한다.) - 해설 신형철 '박완서라는, 소설의 고향- 고인의 마지막 소설집에 부쳐'중에서

 

 

어디에도 휘둘리는 법 없이 굳건한 모습으로 늘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어 주셨으며, 팔순 가까이 새작품을 써내는 것으로 후배들에게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신경숙 

 

 

오랫만에 내 땅에 첫발을 디딘 착지감은 눈 감고도 느낄 수 있는 첫사랑과의

터치처럼 에로틱하기조차 했다. 죽어서도 당신에게 스미고 싶어, 그런 황홀경이었다.

불편한 몸으로 유럽 여행끝에 인천공항에 첫발을 내딛은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의 결말 부분이다.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그해에는 입학식이 6월에 있었다고)

 동월 25일에 난 전쟁으로 학업은 중단, 6.25를  경험한 세대라는것,

전쟁중 결혼하셨고, 아이다섯에 전업주부였지만 문학에의 열정은 놓지 않았던,

마흔에 등단, 여든까지 왕성한 활동하시고, 

결국 떠나시기 전 2006년에 서울대학교 명예문학박사학위(국내인 여자로서는 제 1호)를

수여(처음에는 고사하시는 바람에 대학측 실무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데 수상한 날 단상에서 수상소감은

 "아무래도 살면서 서울대생이라는 조건때문에 덕본 것이 많아서

은혜를 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였다."고.

고인은 서울대에 15억이라는 거금 기부하였다.

한 평생 어찌 이리도 여러몫을 골고루 다하고 가시는지..

고개숙여 당신이 남긴 작품들이라도 남김없이 탐독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