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 박후기

구름뜰 2012. 1. 26. 09:10

 

 

 

시집을 읽다보면 안읽히는지 못읽는지 그런 시 있습니다.

집중력, 이해력부족인지

 지난 가을 어느 시인에게 들은 <미학코드>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어려운 시 만나거든 '코드 맞지않구나' 그렇게 생각하라고

이해할려고 더 노력하라던. 아름다운 코드를 맞출려면 한걸음 물러나 보라는 말씀까지.

박후기 시집을 읽다가 물러나기 싫도록 착 감기는 몇 편의 시 눈에 띄어 올려봅니다.

즐감하시길..

 

 

 

사랑

글렌 굴드

 

침묵은

말 없는 거짓말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살아야 하는 여자와

살고 싶은 여자가 다른 것은

연주와 감상의

차이 같은 것

건반 위의 흑백처럼

운명은 반음이

엇갈릴 뿐이고,

다시 듣고 싶은 음악은

다시 듣고 싶은

당신의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면서 참말이고

참말인듯 거짓말인 것들

한입으로  두말하는 것 같지만

한마음이기도 하면서 두마음인 순간들

일관성없는 순간을 일관성있는 순간인양 버티는 것이

 우리 살아가는 모습인지도 모르지요.

박후기 시집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는 제호가 퍽 인간적입니다.

 듣고 싶은 거짓말이 들리는 참말보다 사랑스러울때 있지요.

피아노 건반처럼 한 몸이지요. 검은것과 흰것은.

 

 

 

 

 

 

사랑의 물리학

상대성 원리

 

나는 정류장에 서 있고,

정작 떠나보내지 못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안녕이라고 말하던

당신의 일 분이

내겐 한 시간 같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생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당신은

날 알아볼 수 없으리라

늙고 지친 사랑

이 빠진 턱 우물거리며

폐지 같은 기억들

차곡차곡 저녁 살강에

모으고 있을 것이다.

하필,

지구라는 정류장에서 만나

사랑을 하고

한시절

지지 않는 얼룩처럼

불편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울게 되었듯이,

밤의 정전 같은

이별은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온다.

 

 

소금 한 포대

 

 천일염 한 포대, 베란다에 들여놓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누런 간수 포대 끝에서 졸졸 흘러내립니다. 오뉴월 염밭 땡볕 아래 살 태우며 부질없는 거품 모두 버리고 결정만 그러모았거늘, 아직도 버릴 것이 남아 있나 봅니다.

 

 치매 걸린 노모, 요양원에 들여놓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멀쩡하던 몸 물먹은 소금처럼 녹아내립니다. 간수 같은 누런 오줌 가랑이 사이로 줄줄 흘러내립니다. 염천 아래 등 터지며 그러모은 자식들 뒺짐 지고 먼 산 바라볼 때, 입 삐뚤어진 소금 한 포대 울다가 웃었습니다.

 

 

 

소금쟁이 사랑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

사랑에 빠지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나는 마음 가는 대로

물 위를 걸어다녔지만

당신은 가끔

파문 같은 미소만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가슴으로 만나고 싶었기에

나는 젖은 손발 슬그머니

거두어들였습니다

가슴으로 당신을 만나자마자

나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두 번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습니다. 

 

 

꽃기침

 

꽃이 필 때

목련은 몸살을 앓는다

기침할 때마다

가지 끝 입 부르튼 꽃봉오리

팍팍, 터진다.

 

처음 당신을 만졌을 때

당신 살갗에 돋던 소름을

나는 기억한다.

징그럽게 눈뜨던

소름은 꽃이 되고

잎이 되고 다시 그늘이 되어

내 끓는 청춘의

이마를 짚어주곤 했다. 

 

떨림이 없었다면

꽃은 피지 못했을 것이다.

떨림이 없었다면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떨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할 때.

한시절 서로 끌어안고 살던 꽃잎들

시든 사랑 앞에서

툭, 툭, 나락으로 떨어진다.

 

피고 지는 꽃들이

몸살을 앓는 봄밤,

목련의 등에 살며시 귀를 대면

기침소리가 들려온다.

 

 

박후기

경기도 평택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3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내 가슴의 무늬> 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가 있으며 2006년 제24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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