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1860~1904)
러시아 최고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당대 작가였던 톨스토이는 체호프를 세계 최고 단편작가라고 했다.
그외에도,
"체호프는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를 가장 잘 분석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시야가 넓어지고 마침내 자유에 대한 놀라운 의미를 얻게 될 것이다" - 버지니아 울프
"누구도 체호프처럼 장소와 정겨아, 인물 간의 대화를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재능을 가지지 못했다" - 서머싯 몸
" 체호프의 단편들은 한없이 차갑지만 따뜻하고 단호하지만 부드럽다. 그의 익살 뒤에는 천근 같은 우수가 기대어 있다. " - 박현섭 서울대 노문학과 교수''..
캄캄한 가을밤이었다. 늙은 은행가는 사무실 이 구석에서 저 구석으로 오라가락하며 십오 년 전 가을에 열렸던 파티를 회상하고 있었다. 손님 중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서 흥미로운 화제들이 거론되었다. 그 가운데는 사형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학자와 기자들이 적잖이 포함된 손님들 대다수는 사형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이 형벌이 기독교 국가에서는 낡고 무익할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인 제도라고 판단했다. 그들 중 몇명의 의견으로는 사형 제도를 종신형으로 대체하는 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파티의 주체자인 은행가는 말했다.
"나는 사형도, 종신형도 겪어보진 못했지만 만약에 '선험적'인 판단이 용납된다면 그래요, 내 생각으로는 사형이 종신형보다 더 윤리적이고 인간적이라고 봅니다. 사형은 단번에 죽이지만 종신형은 천천히 죽이는 것이죠. 어떤 형리가 더 인간적이까요? 몇 분 만에 당신을 죽이는 쪽일까요. 아니면 오랜 세월을 질질 끌면서 당신의 생명을 앗아가는 쪽일까요?"
"어느 쪽이 됐든 간에 비윤리적인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손님들 중의 누군가가 말했다.
"왜냐하면 두 쪽 다 똑같은 목적, 즉 생명의 박탈이라는 목적을 갖는 것이니까요. 국가는 신이 아닙니다. 돌려받고 싶어도 돌려받을 수 없는 생명을 국가가 빼앗을 권리는 없습니다."
손님들 가운데 스물다섯 살 쯤 된 젊음 변호사 한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의견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형이든 종신형이든 매한가지로 비윤리적입니다만 그래도 누군가 나에게 사형과 종신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뭐 저야 물론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어찌 됐든 사는 게 아예 없어지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요."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그때만 해도 젊었고 그래서 예민했던 은행가는 갑자기 평정을 잃고 주먹으로 책상을 쾅 치며 젊은 변호사를 향해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독방에 오 년 동안 들어가 있을 수 있다면 이백만 루불을 걸겠소"
"그게 만약 진담이라면"
하고 변호사가 그에게 대답했다
"오 년이 아니라 십오 년을 조건으로 내기에 응하겠소."
"십 오년? 그러지!"
은행가는 소리쳤다.
"여러분, 내가 이백만 루불을 걸겠습니다.!"
"좋습니다! 당신은 이백만 루불을 거세요. 나는 내 자유를 걸겠습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그리하여 이 지독하고 황당한 내가가 이루어진 것이다.
스스로도 계산이 안 될 정도로 돈이 많았던 탓에 건방지고 경솔했던 당시의 은행가는 이 내기에 꽤나 흥분했다. 저녁 식탁에서 그는 변호사에게 농담 삼아 말했다.
"젊은이, 아직 늦지 않았으니 정신을 차리시오. 나야 이백만 루불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신은 인생의 황금기를 삼사 년 잃게 되는 것 아닙니까. 삼사 년이라고 말한 이유는 당신이 그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운 나쁜 젊은이,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스스로 택한 강금은 강제적인 강금보다 훤씬 더 힘들다는 점이오. 매 순간 당신이 독방에서 자유롭게 나갈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당신의 존재 전체에 독을 퍼뜨릴 겁니다. 난 당신이 불쌍해요!"
그리고 지금 은행가는 방을 이리저리 오가며 이 모든것을 돌이켜 보고는 스스로에게 불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내기를 했을까? 변호사가 인생의 십오 년을 잃고 내가 이백만 루불을 얻는 것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 일인가? 그것으로 사형이 종신형보다 낫거나 나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을까? 아니야, 아니야, 정신 나간 짓이야, 나로 말하면 권태에 지친 인간의 변덕이었고 그 변호사로 말하면 순전히 돈에 대한 갈망이었을 뿐이지......,
그는 계속해서 그날 저녁 이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변호사는 은행가의 집 정원에 지어진 바깥채 중 하나에서 엄중한 감시 속에 감금되도록 결정됐다. 또한 그에게는 십 오 년 동안 바깥채의 문턱을 넘을 권리, 살아 있는 사람들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을 권리, 그리고 편지나 신문을 받아볼 권리를 박탈한다는 조건이 붇었다. 악기를 지니고 있거나 책을 읽고 편지를 쓰는 일, 그리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허용되었다. 조건에 따르면, 그가 외부 세계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접촉은 이 내기를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작은 창문을 통하여, 그것도 말없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책이든, 악보든, 술이든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은 메모지에 쓰기만 하면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지만 반드시 창문을 통해야만 했다. 꼐약서는 완벽한 독방 감금이 되게끔 구석구석까지 면밀하게 검토되었으며, 이에 따라 변호사는 정확히 1870년 십일월 십사일 열두시부터 시작하여 1885년 십일월 십사일 열두시까지 감금되도록 되어 있었다. 변호사 쪽에서 조금이라도 조건을 위반할 경우에는, 설령 기한을 마치기 이 분 전이라 할지라도 은행가는 이백만 루불을 지불할 의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감금되던 첫해에 변호사는 -그의 짤막한 메모들로 미루어 짐작한다면- 고독과 무료함 때문에 심하게 괴로워했다. 그가 사는 바깥채에서는 낮이고 밤이고 게속해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술과 담배를 사절했다. 그가 메모지에 적은 바에 따르면 술은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며, 그 욕망이란 수인의 첫 번째 적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상대도 없이 좋은 술을 마시는 것처럼 따분한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담배는 방안의 공기를 탁하게 만든다는 애기도 있었다. 첫해에 변호사가 받아본 책들은, 복잡한 삼각관게로 이루어진 애정 소설이나 탑정 소설, 공상 과학소설, 코미디물 따위의 지극히 가벼운 내용들이었다.
두 번째 되던 해에 바깥채의 음악 소리는 이미 잠잠해졌으며 변호사는 메모지에 단지 고전 서적들이 필요하다는 요구 사항을 적어낼 뿐이었다. 오 년 째 되던 해에는 다시 음악 소리가 들리더니 수인은 술을 부탁했다. 창문을 통해 그를 관찰한 사람들 말로는 그가 그해 내내 오로지 먹고 마시고 침대 위에 누워 있었으며 자주 하품을 하고 신경질적으로 혼잣말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책은 읽지 않앗다고 한다. 이따금 밤이면 앉아서 글을 쓰다가 날을 지새고, 아침에는 썼던 것을 전부 갈가리 찢어버렸다고 했다. 그가 우는 소리도 여러 번 들렸다고 했다.
육 년 반이 되었을 때 수인은 외국어와 철학과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런 학문들에 너무도 탐욕스럽게 몰입했기 때문에 은행가는 책을 대주기가 벅찰정도였다. 사 년 동안 그의 요구에 따라 주문한 책이 육백여 권에 달했다. 그 몰입의 기간 동안 은행가는 자신의 수인으로 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다.
친애하는 나의 간수님! 당신에게 이 문장들을 여섯 개의 언어로 쓰겠습니다. 이것을 전문가들에게 보여주고 읽어보라고 하세요. 만약에 그들이 틀린 곳을 한 군데도 찾아내지 못할 경우에는 간청하건데 사람을 시켜 정원에서 총을 한 발 쏘도록 해주세요. 그 총소리는 나의 노력이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온 세상의 천재들이 수천 년에 걸쳐서 다양한 언어로 진리를 말했지만 그 말들 속에는 오로지 하나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 내가 이들을 이해할 수 있음으로써 내 영혼이 누리는 천상의 행복을 당신이 알기나 할까요!
수인의 요구는 이루어졌다. 은행가는 정원에서 총을 두번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나서 십 년째 되는 해가 지났을 때, 변호사는 책상 앞에 꼼짝 않고 앉아서 오직 복음서만을 읽고 있었다. 은행가는 이상하게 여겼다. 사 년 만에 육백여 권의 심오한 서적을 섭렵한 사람이 두껍지도 않고 알기도 쉬운 책 한 권을 읽는 데 일 년을 허비한 것이다. 복음서의 뒤를 이은 책은 종교사와 신학 서적들이었다.
유페되고 나서 마지막 이 년 동안 수인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읽었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바이런과 세익스피어를 요구했다. 종종 그로부터 화학, 의학 교과서, 장편소설, 철학이나 신학 논문 따위를 동시에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메모가 오기도 했다. 그의 독서열은, 바다 위에 널린 난파선의 잔해들 속에서 헤엄치면서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무것에나 무턱대고 매달히는 한 인간을 연상시켰다!
2
노은행가는 이 모든 것을 회상하며 생각했다.
'내일 열두시에 그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약속한 대로 나는 그에게 이백만 루불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돈을 주면 모든 게 끝난다. 나는 여지없이 파산할 것이다......,'
십오 년 전만 해도 그에게는 계산이 안 될 만큼 많은 돈이 있었지만 지금은 스스로에게 묻기가 두려웠다. 자신의 돈과 빚 중에 어느 쪽이 더 많을까? 아슬아슬한 주식 놀음, 도박과 다름없는 투기에 대한 열정은 나이가 들어서도 버릴 수 없었고 그로 인해 그의 사업은 조금씩 기울었다. 그리하여 대담하고 자신만만한 갑부는 이자율이 조금이라도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부들부들 떠는 이류 은행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망할 놈의 내기야!"
노인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이 인간은 왜 죽지 않았을까? 이자는 아직 마흔살 밖에안 됐어. 이자는 나의 마지막 재산을 가져가서 결혼도 하고 주식 투자도 하면서 인생을 즐기겠지. 그런데 나는 거지처럼 선망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가 날마다 되풀이하는 말을 듣게 될 것야. '나는 당신에게 내 인생의 행복을 빚졌습니다. 그러니 당신을 도와주게 해 주세요!' 아니야, 이건 너무해! 부도와 파산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이 인간이 죽어주는 것뿐이야!'
시계종이 세시를 울렸다. 은행가는 귀를 기울였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잠들었고 창문 너머에서 나무들이 추위에 몸을 웅크리며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그는 십 오년 동안 한번도 열린 적이 없었던 문의 열쇠를 내화금고에서 꺼냈다. 그리고 그는 외투를 입고 집을 나섰다.
정원은 어둡고 추웠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매섭고 습기찬 바람이 괴성과 함게 정원을 온통 휩쓸고 다니면서 나무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은행가는 눈을 부릅떴지만 땅이고 하얀 석상이고 바깥채고 나무들이고 간에 분간이 되지 않았다. 바깥채가 있는 지점까지 다가온 그는 경비원 큰 소리로 두 번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경비원은 악천후를 피해 부엌이나 온실에서 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게 만약 내 자신의 목적을 수행할 만한 용기가 충분히 있다면'
노인은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경비원이 의심을 받게 될 거야"
그는 어둠 속에서 계단과 문을 더듬더듬 찾아내고는 바깥채의 현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으로 더듬어가며 좁은 복도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가 성냥을 켰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의 침대가 시트도 씌워지지 않은 채로 놓여 있었으며 구석에는 철제 난로가 희끄무례하게 보였다. 수인의 방으로 통하는 문에 붙여진 봉인은 멀쩡한 상태 그대로였다.
성냥불이 꺼지자 노인은 흥분에 몸을 떨며 작은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는 촛불이 어슴푸레하게 타고 있었다. 수인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펼쳐진 책들이 두 개의 안락의자와 카펫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오 분이 지났지만 수인은 몸 한번 뒤척이지 않아다. 십 오 년간의 감금 생활은 그에게 꼼짝도 안하고 앉아 있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다. 은행가는 손가락으로 창문을 똑똑 두드렸지만 수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은행가는 조심스럽게 문에서 봉인을 뜯어내고 자물쇠 구멍에 열쇠를 집어 넣었다. 녹이 슨 자물쇠는 목쉰 소리를 냈고 문은 삐걱거렸다. 은행가는 당장 깜짝 놀라 내지르는 비명과 주춤거리는 발소리를 듣게 되리라고 기대했지만 삼 분이 지났는데도 문 저편에서는 이전처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했다.
책상 앞에는 여느 인간과는 다른 한 남자가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그것은 살가죽을 입혀놓고 여자처럼 치렁치렁한 곱슬머리와 더부룩한 턱수염을 달아놓은 해골이었다. 얼굴색은 흙빛을 닮아서 누르스레했고, 양볼은 움푹 꺼져 있었으며, 등은 길고 가늘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달린 머리를 받치고 있는 팔은 어찌나 갸날프고 앙상한지 보기가 역겨울 지경이었다. 그의 머리카락 사이에는 벌써 새치가 드문드문 보였다. 노인처럼 쇠락한 얼굴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가 마흔 살밖에 안 됐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터였다. 그는 자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숙인 그의 머리 앞의 책상 위에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고 거기에 자잘한 글씨로 무언가 씌어 있었다.
'불쌍한 인간!'
하고 은행가는 생각했다.
'자고 있구나. 아마도 꿈속에서 백만 루불을 보고 있겠지! 나는 그저 이 산송장을 들어서 침대에 던져놓고 베개로 가볍게 덮어서 누르면 되는 거야. 천하의 전문가라도 피살의 흔적을 찾아내지는 못할걸. 하지만 우선 이자가 여기다 뭐라고 썼나 읽어볼까.'
은행가는 책상에서 종이를 집어들고 읽어 내려갔다..
내일 열두시에 나는 자유를 얻고 사람들과 교류할 권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 방을 떠나 태양을 보기에 앞서 나는 그대들에게 몇 마디 해줄 필요를 느낀다. 순수한 양심에 따라,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신 앞에 맹세로, 나는 자유와 생명과 건강을, 그리고 그대들의 책 속에서 지상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을 경멸한다고 그대들에게 단언하는 바이다.
십오 년 동안 나는 속세의 삶을 면밀하게 연구했다. 내가 땅도 사람들도 못 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대들의 책 속에 향기로운 술을 마셨으며, 노래도 불렀고, 사슴이며 멧돼지를 쫒아 숲으로 달려 들어가기도 했으며 여인을 사랑하기도 했다. ..... 천재 시인들의 마법으로 창조된, 구름처럼 하늘거리는 미녀들이 밤마다 나를 차아와서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속삭여 주었고 나의 머릿속은그 이야기들로 흠뻑 취하곤 했다. 그대들의 책 속에서 나는 엘브루스와 몽블랑의 정상에 올랐으며 거기서 아침마다 태양이 떠오르고 저녁이면 그 태양이 하늘과 대양과 산맥의 정상을 발그레한 황금색으로 물들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거기서 내 머리 위로 구름을 가르며 번뜩이는 번개를 보았다. 나는 초록빛 숲과 초원을, 강과 호수와 도시를 들었고, 나에게로 날아온 아름다운 악마들과 신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날개를 만져보기도 했다........, 그대들의 책 속에서 나는 바닥 모를 심연에 몸을 던지기도 했으며, 기적을 창조하고, 살인을 하고, 도시를 불태우고, 새로운 종교를 설파하고, 완전한 왕국을 정복하기도 했다.
그대들의 책은 나에게 지혜를 가져다주었다.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사고 능력으로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해 낸 모든 것들이 나의 두개골 속에서 작은 언덕으로 쌓였다. 내가 그대들 누구보다도 현명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또한 나는 그대들의 모든 것을 경멸한다. 이 세상의 모든 행복과 지혜를 경멸한다. 그 모두가 시시하고 무상하며, 신기루처럼 공허하고 기만적인 것이다. 그대들이 아무리 오만하고 현명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죽음은 그대들을 마루 밑의 쥐새끼들처럼 지상에서 쓸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의 자손과 역사, 천재들의 불멸의 업적들은 꽁꽁 얼어붙어 버리거나 아니면 지구와 함께 불타 없어질 것이다.
그대들은 분별을 잃고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그대들은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추악한 것을 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만약에 사과나무나 오랜지나무에 무슨 일이 생겨서 열매 대신에 개구리나 도마뱀이 열리게 된다면, 혹은 장미꽃이 말의 땀 냄새를 풍기게 된다면, 그대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하늘을 땅으로 바꾸어 버린 그대들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대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대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한때 천국을 꿈꾸듯 갈망했으나 이제는 하찮게 보이는 이백만 루부를 거부하겠다. 그 돈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탁하기 위해 나는 약속한 기한이 다 되기 다섯시간 전에 여기에서 나갈 것이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계약을 위반하는 바이다.......,
이것을 다 읽은 은행가는 책상 위의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 기인의 머리에 입 맞춘 뒤에 눈물을 떨구며 바깥채로 나섰다. 그동안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괴감을, 심지어 주식 투기에서 거액의 돈을 날렸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극심한 자기혐오를 그는 느꼈다. 그는 집으로 올아와서 침대에 누웠지만 흥분과 눈물 때문에 오래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경비원이 뛰어와서 그에게 보고했다. 바깥채에 살던 남자가 창문을 통해 빠져나와서 대문을 나서더니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는 얘기였다. 은행가는 하인들과 함께 당장 바깥채로 가서 자신의 죄수가 탈옥했음을 확인했다. 그는 불필요한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책상 위에서 포기의 의사를 담은 종이를 집어들고 자기 방으로 가져가서는 내화 금고 속에 집어 넣고 문을 잠갔다.
-1888년
'체호프의 단편선'에는 '내기'를 포함 9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내기'는 색다른 소재다. <감옥에 유폐된 한 인간이 엄청난 독서와 구도의 노력을 통해 궁극의 진리에 이른다>는 작품이라는 평이 있다. 결국 유일한 진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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