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세상에 예쁜 것 /박완서

구름뜰 2012. 10. 6. 11:40

 

 

재료야 거기서 거기겠지만 유독 맛을 잘 내는 이가 있다.

그가 새 메뉴를 내 놓았다는 소식이 들리면

이번엔 어떤 맛일까, 어떻게 다듬고 버무렸을까

어떤 모양일까 먹고 싶어 안달이 난다.

 

그를 손을 거친 재료는 무엇이든 특별한 것이 된다.

그 다워서 화려하지도 않지만  내겐 성찬이다. 

소박한 성찬은 그다워서 실망을 해 본적이 없다.

 

작년 1월에 타계하시고 올 초 유작으로 <기나긴 하루>가 나왔을 때

이제 다시는 이런 맛을 볼 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한데

 반갑게도 <세상에 예쁜 것>이라는 성찬이 며칠 전에 나왔다.

 생전 출력해서 서랍에 넣어둔 것들과 책으로 엮어지지 않은 것들만

모아서 큰딸 호원숙씨가 만든 책이라고 한다.

 

이러니, 예술은 길다. 

내가 사랑하고 사랑받은 것들은 기억으로 가져가고,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어도 좋고

다른이에게도 유익한것, 미적 자양분이 되는 작품은 남는다.

신이 만든 자연도 풍화하지만 인간이 문학작품은 남는다.

 

 

 

 

 

40세에 첫 소설을 쓰고 나서 다시 40년 가까이를 더 살았으면서도

나는 내가 아직도 충분히 젊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젊다는 건 체력이나 용모를 말하는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감수성과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고

옳지 못한 일에 분노하고 부조리에 고뇌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말하는데.

이런 정신의 탄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각자 사람에 다라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글쓰기가 아닌가 한다.

 

글 쓴 지 40년이 다 되지만 어떻게 된 게 이 노릇에는 숙련이라는 것이 없다.

숙련은 커녕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는게 이노릇이다.

소설 한 꼭지를 쓰고 나면 몸에서 진액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무력해진다.

쥐어짜고 나면 반드시 풀어줘야 하기 때문에 집중과 이완의 적절한 반복이

결국은 정신의 탄력을 유지시켜주는 비결이 된다고 여기고 있다.(2009년)

-나는 왜 소설가 인가 중에서-

 

 

 

 

글을 쓸때 늙었다고 하는 것은 속도가 느려졌다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이 경직되고 진부해졌다는 것이라 봅니다..

내 감수성이 진부해지지 않도록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합니다.

어떻게 노력하느냐 하면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것입니다.

또한 문학 외에 예술 분야에도 애정을 갖고 자주 접하고 느낌으로써

내 감수성이 녹슬지 않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또록 하는 것.

좋은 것을 보면 감동할 수 있는 것.

이 세세상에 감동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그러니까 기성작가도 다 노력을 합니다.

-나의 경험 나의 문학 -중에서

 

 

 

정신의 허기가 느껴질 때 책만큼 좋은 게 없다.

 영양을 공급받는 에너지 원이 된다. 

누군가 그랬다. "인생을 작동시키는 최고의 연료는 독서" 라고,,

 

사랑처럼 열정적으로 갈망하진 않더라도

세끼밥처럼 굶을 수 없는 것.

이 책 속에 산문 '책갈망'이라는 단원도 재밌다.

 

 

박경리 작가 1주기 추모 행사로 토지문화관에서 열린

박완서 작가의 문학강좌 대담록 중,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의 질문, 

"문학작품을 쓰실 때 고민을 하고 곤란해하시기도 하는지,

또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에 대한 답이다.

 

감동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감동에 헤픈 편이어서 그런지 나는

재밌게 사는 축에 드는 것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게 죽기 엿새 전이었다.

그는 더는 허세를 부리지 않았고 혀가 어눌해져 간단한 대화도 나울 수가 없었다.

그 용감무쌍하던 사람이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흔리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유학 갔다 급히 돌아와 간병 중인 아들 내외와 5.6개월쯤 되는 손자가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며느리가 어려운 시중을 들고 있었고

어젯밤을 어머니 곁에서 꼬박 세웠다는 아들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코를 골고 있엇고,

그 곁에 아기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병실이 넓고 쾌적해 잠든 아빠와 아기가 전혀 불편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병원인데 아기가 거기서 줄곧 있어야 된다는 게 안돼 보였다.

전염병은 아니지만 누군가 아기를 데려다가 잠시 봐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옳지 않다는 걸 곧 깨달았다.

고통스럽던 병자의 얼굴에 잠시 은은한 미소가 떠오르면서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을 보니

잠든 아기의 발바닥이었다. 포대기 끝으로 나온 아기 발바닥의 열 발가락이

 "세상에 예쁜 것" 탄성이 나올 만큼, 아니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예뼜다.

 

수명을 다하고 쓰러지려는 고목나무가

자신의 뿌리 근처에서 몽실몽실 돋는 새싹을 볼 수 있다면

그 고목나무는 쓰러지면서도 얼마나 행복할까.

병자도 지금 그런 위로를 받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기의 생명력은 임종의 자리에도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찬탄이 절로 나왔다. (2009년)

-세상에 예쁜 것- 중에서

 

 

 

 

김점선 화가 이야기다.

생전, 툭하면 아차산 능선을 타고 우리 동네까지 걸어와

 벨도 누르지 않고 우리 집 마당에 불쑥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던

그 건각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김전선 화가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보인다.

절대로 약한 모습 보일리 없는 그녀가,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되는 건

 손을 잡고 눈믈을 보였다는 부분을 읽으면서다.

 

 <점선뎐>(김점선작) (이 책 제호를 김전선 화가가 '전'도 아니고 '뎐'이라고 붙인 이유는

 춘향뎐이나 심청뎐처럼 고전에서 주인공의 이름에다

뎐을 붙인 것을 보고 자신도 이름자에다 그렇게 붙이노라는 주가 있는 책이다.

강권하고 싶은 책이다.)

 

<점선뎐>에는 박완서 선생님댁엘 걸어서 더러 갔는데

가서는 들어오라는 선생님 말씀도 듣지 않고 현관 입구 벤치에 앉아서

 볕을 쐬거나 마당을 한 참 들여다 보다 돌아온다는 얘기가 있다.

아무리 들어오라고 해도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그 답게..

 '신발을 벗기 싫어서'라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있다.

 

선생님의 '건각'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화가다..

그외 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교수에게 쓴 글도 있는데

그녀의 삶이 잔잔히 보여서 감동이다.

천국에선 몸의 불편없이 건강하라는 염원이 따뜻하게 와 닿는다.

 

 

 

 

 

그립고 생각나는 사람들은 이제는 이 세상보다 저 세상에 더 많구나

그런 생각이 나를 한없이 쓸쓸하게 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들 역시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하면

인생은 아름답고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힘으로 이룩한 업적이나 소유는 저세상에 가져갈 수 없지만

사랑의 기억만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아진다.

나의 성품 중 가장 기특하고 고마운 건, 욕먹고 미움 받은 건 쉬이 잊어버리고

사랑받은 건 오래 기억하는 게 아닐까.

그런 능력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나를 그렇게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고맙고 그립다.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제는 떨굴 잎사귀조차 안 남은 채 의연한 나목을 볼 때마다

특히 그립고 생각나는 저세상 사람은 고 박수근 화백과 김상옥 선생님이다.

박수근 화백은 그를 주인공으로 해서 쓴 소설 <나목>이

나에게 새로운 제 2의 인생을 살게 해주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쳐도

김상옥 선생을 나목과 연관 지어 잊을 수 없는 사연은 나만 꺼내보고 싶은 보물이다.

-의연한 나목을 볼 때마다 김상옥 선생님을 기리며 - 중에서

 

 

 

 

책 말미에

친애했던 지인들에 대한 소회도 잔잔히 펼쳐져 있다.

김점선 화가부터, 장영희 교수,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피천득 선생님,

김상옥, 박경리,등 대게는 고인이 되신 분들께 쓴 글이고,

  이해인 수녀님이나, 김창완, 법조인이 된 손자에게 당부하는 글까지 실려있다.

 

팔순이 다 되고도 충분히 젊다고 생각하셨다는 말씀이 공감간다

정신의 탄력을 유지하면서,

감수성이 진부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것,

그것이야 말로 젊음의 유지 비결이라는 말이 대공감이다.

무슨 말로도 다 형언못할 선생님을 이 책으로 다시 한 번 더 뵙게 되니 그저 좋다.

 

 

 

 

마흔에 등단하여 이세상 많은 작가, 특히 나이많은 작가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박완서 선생님의 삶

'세상에 예쁜 것'은 이런 삶 아닐까. 

 

박경리 선생님과 더불어 우리나라 문학계의 산 거목이셨다.

높고 맑은 정신의 소유자들,  어딘가에서 세상을 받치고 있는 것 같은 분들

책에서 열거한 분들이 데체로 그런 분들이라 더 좋았다. 

 

그리운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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