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수필

추석이야기

구름뜰 2013. 4. 5. 08:51

벌초의 계절이다. 남편에겐 형이 두 분 있지만 멀리 살아서 고향 가까이 사는 남편과 시동생이 그동안 벌초를 자기 일처럼 도맡아 왔다. 멀리 있다고 남의 일 같을 리는 없으니 불참하는 그 마음도 매번 편치 않아 보였다. 하건 하지 않건 벌초는 편할 리 없는 일이었다.

 

재작년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시골집도 정리했다. 큰아주버님은 시류에 따라 벌초를 대행업체에 맡기자는 제안을 냈고 비용은 갹출해서 부담해오고 있다. 전문가의 손을 거친 산소는 좋은 이발사를 만난 것처럼 깔끔하고 훤해서 보는 마음까지 넓어진다.

 

명절 모임은 교통난이 덜한 추석을 한 주나 두 주 앞당겨 하는 산소나들이로 대신하게 되었다. 음식도 간소해져서 며느리들도 부담이 덜해지니 마음이 가벼워졌고 모두 모이는 시간이 정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시부모님 무덤에는 당신이 생전에 섬기시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그 앞에 서면 아주버님은 한 해 동안의 경과를 조목조목 보고 하신다. 어머니, 아버지 누구는 왔고 누구는 못 왔습니다. 올해는 손자 누구가 취직을 했습니다. 기쁘시죠. 누구는 고3입니다. 도와주세요. 살아계셨다면 이렇게 좋아하고, 저렇게 마음 써주실 두 분의 반응이 짐작되고도 남는 시간이다.

 

얼굴도 모르는 시조모님께 가는 길은 집안 아저씨네 과수원 한가운데를 지난다.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탐스런 그것들 곁을 지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닌데 아저씨네는 먼 데서 온 우리에게 “따먹는 거야, 기꺼이”라며 넉넉한 인심과 인정으로 우리를 반겨주신다. 시조부님께 가는 길엔 밤나무가 자기를 먼저 열어준다.

 

 

 

김시습의 <금오신화>에는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근본에 보답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라는 내용이 있다. 조상을 섬기는 것이 조상을 위한다기보다는 본뜻은 자식들에게 효나 섬김을 교육하는 방편이라는 내용인데, 내 경우엔 조상님 산소 가는 길을 아이들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 같으니 산소나들이의 수혜자는 내가 아닐까 싶다.

600년 전, 그 시절 제례의식이나 규범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이러하지 못했으므로 이랬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세계관을 작품에 녹여낸 건 아닐까.

 

오래전 어느 종갓집 종손으로 살아온 이가 아들에게 당부하는 글을 인상적으로 읽은 적이 있다. ‘누군가 시작해야 한다면 내가 먼저 하고 싶으니, 아들아 진심으로 부탁하니 나를 위해서는 그 어떤 제사도 지내지 마라. 혹여 누군가 네게 불효자식이라고 욕한다면 아버지의 유언이었다고, 너는 반드시 내 말을 명심하라’는 내용이었다.

 

다양한 문화의 중첩 속에서 문화도 다양하게 재편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관습도 마찬가지리라. 농경시절 집성촌에 모여 살던 때 같았으면 수월했겠지만 산업화, 도시화로 분산된 환경에서 그 형식을 그대로 강요한다면 불편하고 불합리할 수도 있다.정신에 손상가지 않는다면 방식은 달라져도 좋지 않을까.

 

앞당겨 지내는 추석과 남의 손에 맡겨진 벌초가 조상님께 불효가 될지는 모르지만, 조상님을 대하는 마음은 훨씬 더 경건해졌고 부담은 가벼워졌다. 명절 분위기도 좋아졌다. 조상님들도 이런 마음을 바라지 않을까. 괜히 나 좋다고 이런 생각 하는지도 모르겠다.

-포스코신문 2012년 9월 27일 

 

이미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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