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는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 회초리만큼 가는 것을 크면 주먹만한 감이 열릴 것이라는 말에 아버지께서 사온 모종이었다. 마당에 심으면 죽을 거 같아 화분에다 심어서 볕 잘 드는 옥상 장독대 옆에서 2년을 키워 대문 옆에다 옮겨 심은 나무다. 아버지는가을이면 온 식구가 나눠먹을 만큼 탐스런 감을 선사해 주는 그 감나무를 유독 아끼셨다. 감잎이 무성한 봄부터 꽃이 지고 진초록의 감이 영글어가는 것을 애지중지 즐기셨다. 저것 좀 보라며 혼자 보기 아까운 손자 보듯 자랑하시곤 했다. 감이 열리고 두어해 동안은 별로였지만 약도 치는 듯했고 해를 거듭할수록 초보 농사꾼 딱지 뗀 듯 감도 실해졌고 때깔도 좋아졌다, 아버지에겐 유일한 소출이었던 감농사가 잘 될수록 자부심도 높아가는 듯했다.
지난 5월이었다. 꽃이 한창일 계절에 뒷집 응달 감나무가 양지쪽 우리 감나무보다 잎도 무성하고 감꽃도 좋았다. 병이 들었는지 잎사귀도 꽃도 맥을 못 추는 지경이라 왜 이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내 탓’이라는 말씀만 하셨다. 어머니에게 들은 사연인즉, 작년에 감의 무게로 휘어진 가지를 이른 봄 싹이 나기도 전에 원가지 쪽으로 당겨 묶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곤 뒷집 감나무에 새 잎이 나도록 기별이 없자 그제야 풀어주었다고. 아버지는 그래도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늦었음에도 잎도 나고 꽃도 피워주는 걸 보면 기특하다고. 부러질까봐 붙잡아둔다는 생각만 했던 그 일이 감나무 숨통을 조이는 일임을 몰랐던 불찰로 감나무엔 선연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분별없는 사랑은 때로는 원치 않았던 얼토당토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내게도 선행학습 안하면 입학도 안한 중학교 성적 추락이라도 할 듯이 억지 과외를 시킨 적이 있었다. 1년쯤 후 체벌이 심했던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는 말을 아이에게 들었을 때 나는 내 발등을 찍은 기분이었다. 아이가 싫어하는 것을 하게 했던 것은 욕심이었다. 과외시키는 엄마가 나뿐이겠으며 체벌하는 선생이 그 선생뿐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면 과욕으로, 사랑이라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행하는 일들이 어디 이뿐일까. 가만 놔두는 것이 무조건적인 사랑보다 더 성숙한 방법일 수도 있는 것을. 사랑도 관심도 상대가 원할 때여야 바람직한 것이며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사랑이 상대에게 상처가 된다면 머지않아 그 사랑은 내 상처로 남기도 한다.
봄날의 상흔은 가을 감에도 남았다. 맛이야 여전하지만 크기도 작고 모양도 제각각이다. 아버지는 감나무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올해는 감 이야기가 없으시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봄이 오면 새순이 날 테고 아버지의 지난날 사랑을 봐서라도 감나무가 잘 자라 줄 거라는 희망이 있다. 내년 이맘때쯤이면 부모님 마음 같은 단감을 먹으면서 올가을을 추억할 것이라는 기대도 가져본다.
이미애 수필가
- 매일신문 2009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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