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원고의 본질은 블로그이고, 내가 쓰던 블로그는 절반쯤의 일기로, 대체로 사적인 글이었다. 이들은 시간순으로 나열되었고, 오랜 기간 정해진 주제 없이 그날 느낀 것을 지속적으로 써온 글이라는 특징이 있었다. 이 글들이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5, 4 박상미
이 책은 2005년 부터 2010년까지 저자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책으로 추려낸 것이다.
애초에 의도가 블로그였던 글들이라 매우사적이고 편안한 문장들이다
구름뜰 블로그를 해온지가 십년이 넘었다
동감이나 소통보다 내겐 기록물 보유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일상에서 맞게 되는 소소한 생각들, 문장들
흘러버리기엔 아까운 것들을 남기는 곳인 셈이다.
그것이 매우 사소한 취향이고 당연히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글쓰기이기도 하다.
1부 (2005년 ~2006년)
닫힌 과거, 빛나는 책
"인간은 이제까지의 자신의 모습과 앞으로 그가 이루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 사이에 놓여 있다"
"닫힌과거와 열린 미래 사이의 이러한 긴장이 없다면 현실에 이상을 대비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다." 2006,3
애드거 앨런 포와 주크박스
비숍이 X자를 해놓은 미발표 시의 제목 '에드거 앨런 포와 주크박스'에 실린 미발표 에세이에서 그녀는 "시를 쓰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행위이다.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다."라고 썼다. 시인의 목표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필요불가결한 일, 즉 그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스스로 설득하는 일이다"라고 했다.
좋은 시란 "가장 환상적인 언어로 가장 하찮은 생각을 전달하는 지루한 행위"가 이닌,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언어로 가장 환상적인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2006,4
솔직함
뭐든 다 말하는 것이, 똥 싸고 오줌 싸고 방귀 뀌는 걸 다 말하는 것이, 솔직한 것만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최대한 노출함으로써 솔직함에, 진정함에 다다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핵심을 벗어난 일이 될 것이다. 일이 핵심에서 벗어나면 부패한다. 매 순간 치열하게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도록 노력함으로써 어디선가 그 솔직함이 그보다 위대한 형태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솔직함의 의미이고 핵심이다 . 2006,8
시인의산문
지금 교정을 보고 있는 마크스트랜드 '변방의 빛'은 에드워드 호퍼 작품에 대한평론이기도 하지만 시인의 산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산문이란 '운문'에 대치되는 광의의 개념이라기보다 수전 손택이 쓴 '시인의 산문'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협의의 개념이다. "산문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개념이다. 수필이 예전에 수필이라 불리던 것처럼 읽히지 않을 때, 길고 짧은 이야기들이 예전에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이라 불리던 것처럼 읽히지 않을 때 우리는 이를 산문이라 한다,"
손택이 이런 얘기를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전통적으로 운문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던 산문이거듭나는 것을, 특히 시인의 손에 의해 거듭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그러니까 시인이 쓴 글인데 기존의 수필이나 소설 등 어떤 장르레 부합하지 않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산문들은 시와 같은 '열정과 밀도와 속도와 내적인 근력'을 갖는다. 이런 맥락에서 스트랜드 '변방의 빛'은 평론이라기보다 그림을 소재로 한 시인의 산문이라 할 수있다. 스트랜드는 '변방의 빛'에서 시적 자아를 버리지 않을 뿐 아니리(그의 어둡고 부조리한 면이 그대로 살이 있다) 호퍼 그림에 힘입어 이를 확장시킨다.
문제는 스트랜드의 산문 언어가 오히려 그의 시보다 '조밀'한 나머지 읽기는 물론, 번역은 더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그의 시어는 일상적이면서도 단순한 언어로 어둡고 부조리한 시상을 불러일으켜서 나에게 적잖은 인상을 남겼다. 반면 그의 산문이 내적으로는 그의 시정을 지녔지만 산문이 지녀야 할 우아함을 성취했느냐에 대해선 의문이다. 산문의 우아함에는 사고의 정교함과 형태의 경제성이 불가피한데, 스트랜드는 '변방의 빛'에서 후자를 곧잘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이 그랬다. 시는 명사고 산문은 동사라고, 스트랜드의 산문에선 주어와 동사의 간결하보다는 어려운 명사들이 난무하고 있다. 보이기 싫어하는 그의 태도 때문일까. 산문에서조차 명백하게 '읽히고' 확연하게 '보이기'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200.8
쓰도록 달콤한
내게 보나르는 언제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화가였다. 라벤더와 오렌지 같은 환하고 화려한 컬러들을 그렇게 남용(?)하는 건 이 모든 빛을 흡수할 만한 어둠을 바탕에 깔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내인 마르트의 얼굴에 드리운 모든 그늘은 차치하더라도 그의 그림엔 산산이 부서지는 색 조각들을 다잡는 어둠의 징조가 있다. 물론 그 어둠은 '표현'이 아니다. '배어남' 일 뿐2006,8
들어올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들어 올림'을 위한 것이다. 그것이 일이 됐건, 사랑이 됐건, 공부가 됐건, 그 노력이 때로 코믹하거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할지라도 궁극은 그렇다는 것이다. 2006,11
이방인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미숙한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이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강인한 자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자이다."2006,11
2부 2007년
나에게 뉴욕
사람들이 내가 쓴 책에서 원하는 것은 결국 뉴욕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거의 처음부터 나에게 뉴욕이란 도시는 중요했다. 내가 태어난 도시가 아니라 내가 살기로 선택한 도시. 뉴욕은 나라는 개인에게 매우 사적인 은유였다.
이 블로그의 글들은 뉴욕에서의 삶을 한국친구들과
일부라도 공유하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라고
서문(스스로 자귀짚다)에 올려져 있다.
- 숄 스타인 버그가 살아 있었다면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을까. 책을 쓰든 뭘 쓰든 자기중심적으로 뉴욕을 느끼고 살라고, 모든 것의 시작은 지독하게 사적인 거라고.
흔적 위에 다시 쓴
고어비달의 친구였던 이탈로 칼비노는 비달을 가리켜 "무의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고, 그 자신은 "나는 정확히 보이는 대로이다. 내면에 따스함이나 사랑스러운 구석은 없다. 나의 차가운 겉모습, 외면의 얼음을 깨뜨리면 아마 차가운 물이 흘러나올 것이다."라고 했다.
항생제
한 번 인사를 나누고다시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매혹과 사랑사이.
포기와 희생, 인간의 진화론적 이해가 속시원할 때도 있는데. 이들도 진화론적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할까? 궁극의 짝짓기를 위한 희생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은 언제나 짝짓기 이상을 암시한다. 인간에게만 시가 있고 예술이 있듯, 인간에게만 사랑이 있고 역설이 있다. 사랑이 위대한 건 그렇게도 잘난 자아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지울 수 있는 상태.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삭제할 수 있는 불가능에 이르는 위력, 사랑하는 건 인간만이 가능하다.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지 않고 평생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힘든 상황 속에서 사랑 때문에 자기가 가진 것들을 포기하며 불가능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여자 때문에 신세 망친 사람" 또는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해"라고 말하며 매도한 적은 없는지. 그들이야말로 에우리데케를 따라 저승으로 내려가는 것도 서슴지 않은 오르페우스이고 아벨라르를 위해 수녀가 되었건 엘로이즈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언어와 슬픔
어느 민족이든, 누가 되었든 뿌리를 내릴 토양이 바뀌는 경험은 거의 비슷한 것이다. 통째로 뒤집히는 경험, 요즘 내 책꽃이 앞쪽에는 몇 달 전에 산 무라카미 하루키의 '슬픈 외국어'가 꽂혀 있다. 의도적인 외국 생활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인 이 책에서 하루키는 "자명성을 갖지 않은 언어에 둘러싸여 있다는 상황 자체가 슬픔에 가까운 느낌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나는 기억한다
조 브레이나드의 책
그의 기억한 줄마다 나의 기억들도 평행으로 펼쳐지는 걸보고 "나도 기억하고 있는 게 꽤 많구나" 한 것이다. 167페이지짜리 책 한 권이 온통 이런 짤막한 기억들로 계속된다. 앞뒤의 일이 반드시 기억나는 것은 아니어도 결국, 열렬히 기억하고 있는 어떤 순간들, 우리는 이런 열렬한 기억의 순간들로 지탱되고 맥락을 갖는다.
백만장자의 모험
실재로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의 눈빛을 보면 탁할 때가 많다. 의심과 두려움이 삶에 대한 사랑과 적극적인 태도를 가린다. 그들의 눈빛은 이 순간에 있지 않다. 반쯤 복잡하고 반쯤 죽어 있다.
- 방안에서만 안전하게 사는 사람이 네바다의 사막 어딘가에서 죽을 확률은 없기에. 포셋이 죽었다면 그의 죽음은 그의 삶의 맥락 안에 있을 것이다. 이런 죽음은 적어도 횡사는 아니다. 그래도 부디 살아있기를.
호퍼의 풍경
호퍼는 집을 그리고 등대를 그렸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원하는 건 집의 벽에 떨어지는 햇빛을 그리는 것이었다"
태도들
'걷기'도 태도이고 '요리하기'도 태도인 것이다. 어떤 사람을 말해주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반복해서, 생각해서 하다보면 결국 하나의 태도, 삶에 임하는 태도가 되는 것이다.
3부
(2008)
지브란의 신화
칼릴지브란은 세익스피어와 노자의 뒤를 이어 전세계적으로 많이 읽힌 시인으로 통한다.
내가 내 몸과 편안해진 건, 생각해보면 서른이 넘어서였던 것 같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받아들일 나이에 와서야 , 하지만 심지어 왜 받아들여야 하나? 왜 그저 이렇게 친하고 재밌는 에로스를 즐기지 못할까? 아무도 모를 이 달콤한 순간을 즐길 수 있다면 최진실같이 예쁜 여자가 욕실에서 목을 매다는 끔찍한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늑대를 요리하는 법
내가 굶주림에 관해 쓸 때 실제로 나는 사랑에 대하여, 사랑에 대한 굶주림에 대하여, 그리고 따뜻함에 대하여, 그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쓰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같은 것이다." 2008,12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음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평소의 부족함이 주는 음식에 대한 흥분감이란 게 별로 없고 심지어 권태감마저 느껴진다. 계란이 귀할 때 먹던 삶은 계란의 맛과 요즘 느끼는 계란 맛이 같을 수 없듯이, 음식에 대한 '허기'가 적당히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식사는 다른 경험이 될 수밖에 없다.
-풍요와 잉여가 이곳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 깊게 배어 있었다. 음식도 부족함을 아는 사람과 함께 먹어야 맛있는 걸 보면 부족함이 없다는 건 뭔가 균형이 깨진 상태라는 게 아닐까. 마찬가지로 결핍을 모르는사람들 속에 살다보니 나도 결핍에서 충족으로 널어갈 때 생기는 즐거움을 감지하는 감각기관 자체가 퇴화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운 순간도 있다.
반드시 그렇기야 할까만... 이라는 부제를 달고 싶다.
풍요와 빈곤을 전제로 두고
같은 상황에서 다른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니까.
확장해 보면, 저 사람 대체 왜 그러지, 왜 그럴까
내 타입 정말 아니다라는 부분들도 결국은 취향이고 성향이다.
그런 경우 저사람은 저렇구나...
딱 거기까지....
다르기 때문에
다른게 정상인거다
내가 내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나무 보듯 그냥 보고 마는 것이다.
내 마음으로 내 가치관으로 보지 않기가 필요한 싯점이다..
피셔 할머니의 말씀처럼 가난은 가난할 때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삶 속에 항상 있는 간난과 결핍을 나름의 스타일로 다스리는 것이다. 즉 '늑대'를 피하기만 할 게 아니라 맛있게 요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랠프 윌도 에머슨은 "창조걱 경제 운용은 훌륭함을 낳는 연료가 된다"고 했다.
4부 (2009~2010)
우아함
어떤 경우에도 우아함을 잃지 말라고, 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해주었다고 상상할 때가 있다. 뜻은 높고, 판단과 실행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해야 하고, 태도는 부드러워야 한다고, 의롭고 외로운 여왕이나 장군을 떠올리라고, 영예로운 뜻과 반듯한 말과 생각, 칼날 같은 실행이 있다 해도 관용이나 인간적 연민이 없다면 우아함은 이루어지지 않은다고, 곧음만을 자랑하던 직선이 몸을 살짝 구부려 공간을 품을 때 비로소 우아한 곡선이 된다.
무신론의 간략한 역사
"글쓰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놈의 생각이란 걸 해야 하니까" 믿음은 생각으로부터 면죄부를 발행한다.
아따금씩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너무 기뻐 팔짝팔짝 뛰어야 한다고 , 누구나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기에. 어떤 행동을 하건, 어떤 말을 하건, 나의 마음만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내 키만한 초록색 덤불로 빙 둘러진, 넘볼 수 없는 정원이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순간, 혐오로 치를 떠는 순간조차 나의 마음은 나만의 것이다.
오 윌리스
"모든 시인은, 아무리 모자란 시인이라도 어떤 양심에 따라 살아간다. 여기서 양심이란 그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 있는 시라는 위대함을 좇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양심을 좇는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모든 시인에게 있어 한 줄의 진실한 시야말로 바로 양심에서 나온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 호세
살다보면 실제로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자기 입으로 자기가 착하다는 말을 정말로(!)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회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착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도대체 언제일까? 대개 그러한 순간은 자신이 상대방을 위해 양보하거나 손해를 감수하거나 희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일 것이다.
착한 사람 호세처럼 남이 하는 듣기 싫은 말도 지겨워하면서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곤 스스로 자신이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그 일이 실제로 즐거웠다면 상대방에게 고마워할 일이지 스스로를 착하다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따라서 타인에게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데 실패하는 이러한 텅 빈 제스처를 반복한다면, 그건 자신의 '셀프 이미지'를 위한 서비스일 뿐이다. 일종의 허약한 나르시시즘인데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미스터리
얼마 전에 놀란 사실이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멀쩡한 사람이었다. 정말로, 매우 멀쩡했다. 얼굴도 괜찮고, 돈도 잘 벌고, 말도 잘하고,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도무지 시간을 같이 보내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대체 그게 뭘까 생각했다. 그러다 얼마 안 가서 퍼뜩 깨달았다. 아, 미스터리가 없구나. 마치 코나 눈 한쪽이 없는 것처럼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어딘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알고 싶은 게 없었고, 그와 같은 장소와 시간을 공유하는 의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알아갈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스터리는 일종의 퀄러티다.
-예술이 지겨울 정도로 많아진 요즘, 미스터리는 상대적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명백한 의도, 이러한 개념에 의해서 나는 이런 작품을 한다는 그 의도가 너무 뻔히 보이면 재미가 없어진다. 미술사의 흐름이 사물 그자체보다 개념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고, 개념을 바탕으로 한 작업들은 개념이 드러나면 종종 그 신비로운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명백한 의도가 결과물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반면 훌륭한 작품들은 의도와 결과물 사이에 깊고 넓은 알 수 없는 세상이 있는 듯하다. 그 세상에서 감히 이해가 불가능한 마법적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독서회에서 읽고 어제 토론한 책이다.
블로그 기록물로 책 낼것을 권유받은 저자가 부럽기도 하지만
그보다 문장이 좋아서 더 부럽다.
어쨌거나 이 책에서도 혼자보기 아까운 문장들
다시 보고 싶은 문장들
되새기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이야기 나누고 싶은 문장들
즉 미스터리!가 있는 문장들을 옮겨보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가 보는 건 내 수준이다.
* 위 사진들은 지난 주말에 다녀온 거창 위승 수승대 정경과 3번 국도 변에 있는 외가마을 풍경이다. 곶감이 외갓집 처마 밑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외할머니 몰래 빼먹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외삼촌이 몇개 빼 주셔서 친구들과 나눠먹었다. 귀절할 만큼 맛난 것들은 때도 잘 맞물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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