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란 도덕 이론가들이 만들어낸 허구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잘 되기를 바라는건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라 할 수 없다. 순수한 이기주의란 완벽하게 정서적으로 닫혀 있거나 의식이 수반되지 않는 무의식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상과의 정서적 연계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 감각을 일으키는 자극과 의지 사이의 짧은 회로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얘기다. 방탕한 사람, 흉악한 범죄자, 냉혈한 들도 이타주의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돈 후안식의 사랑이 사랑의 한 형태로 생각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타적인 행동이 이기심에서 비롯한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이기적인 행동 속에 이타적인 동기가 숨어 있다는 것 또한 증명될 수 있다. 이타적인 동기 없는 이기심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두 개념 모두 극단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을 보면 거의 코믹하다. (중략)
실제로 이기주의의 경우 파헤치면 언제나 드러나는 것은 주변과의 정서적 관계이다. 즉 '나'와 '당신'의 관계로, 이 관계는 양극단에서 모두 이렵다. 그러나 이는 이 세상에 순수한 이타주의란 없는것과 마찬가지의 진실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해치기도 하는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긴 하지만 달리 표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미워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과 미움은 오해하기 쉬운 외양을 띤, 어떤 강력한 동력이 자아내는 돌발적인 증상이다.
이 동력은 동료 인간을 향한 도덕적인 동력이 자아내는 돌발적인 증상들이다. 이 동력은 동료 인간을 향한 도덕적인 적극성 또는 완전히 희한한 충동이라고밖엔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에게 매우 열렬한 방식으로 흘러들어가거나, 아니면 그를 없애버리거나, 또는 내적인 창조력이 가득한 하나의 무리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타심과 이기심은 이러한 도덕적 상상력을 표현하기 위한 가능성들로, 이제까지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많은 형태의 도덕적 상상력 중 일부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 맥락에서, 악은 선의 반대 개념, 또는 선이 부재한 상태가 아니다. 선과 악은 유사한 현상이다. 이제까지 사람들의 생각처럼 이들은 도덕에 있어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안티테제가 아니다. 심지어 이들은 도덕이론에서 그다지 중요한 개념들조차 아니다. 다만 실질적이고 불순한, 요약된 개념일 뿐이다. 선과 악을 정반대 개념으로 나눈 것은 모든 것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던 초기 사상의 전통에서 비롯한다. 어쨌든 이러한 개념의 대립은 별로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도덕에 있어 이 두 개념의 나눔이 중요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된 것은 다음의 이원론과 혼동했기 때문이다. 즉 반대할 만한 것/지지할 만한 것. 이 안티테제는 모든 문제에 적용될 수 있고, 도덕의 중요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어, 이를 흐리게 하거나 모호하게 하는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든 좋은 이론이라 할 수 없다.(중략)
이제껏 선언된 모든 도덕적 제안 중 가장 이타적인 분위기에 속하는 건 "네 이웃을 사랑하라"나 "선을 행하라'는 말보다는 도덕적 덕목들을 배울 수 있다는 명제이다. 인간의 모든 이성적인 활동은 타인을 필요로 하고 공유된 경험의 교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도덕성 자체는 타인들과 떨어져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소통할 수 없는 이 상태에서 사람들은 선과 악이 필요하게 된다. 선과 악, 의무와 의무의 위반이라는 형태 속에서 개인은 자신과 세게 사이에 정서적 균형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형태들의 유형학을 정립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결국 이 (형태)들을 낳게 된 압박이나 이들이 처한 곤궁을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
인간의 행동은 우리가 영웅인지 선자인지 또는 범죄자인지를 표현하기 위한 말더듬이 언어일 뿐이다. 심지어 강간살해범조차, 그의 깊숙한 영혼 속 어딘가에는, 깊은 내면적 상처와 숨겨진 매력들로 가득차 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세상은 그를 아이처럼 학대했고, 그는 세상이 그에게 찾아준 것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표헌할 방법을 찾을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범죄자들은 연약함과 세상에 대한 저항감을 모두 갇고 있다. 이는 강력한 도덕적 숙명을 띤 모든 사람들에게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경멸할 만은 사람일지언정, 그런 사람들을 파멸시키기 전에 우리는 그 안의 무엇이 저항하고 있고, 또 무엇이 그의 연약함 때문에 타락했는가를 받아들이고 기억해야 한다. 드러나는 현상이 가지는 형태에 겁먹은 나머지 이에 손대기조차 꺼리는 성자 같은 사람들만큼 도덕성에 해를 끼치는 사람은 없다.
*로베르토 무질의 에세이집 '정확성과 영혼' 중 '도덕의 열매'(1913년) 에서 발췌하고, 번역한 글이다. 이 글머리에 실린 편집인 글은 이렇다. "무질은 이 글에서 니체의'선악을 넘어서'의 맥락에서 정서적 관계의 복잡성과 도덕적 삶의 고독한 현실에 부응할 수 있는, 윤리적 사고에 대해 논하고 있다. ."
'나의 사적인 도시 ' 박상미 에세이.이기와 이타 중에서..
*구미에 첫눈이 온 아침
새벽에 잠깨 보니 창밖이 뿌윰했다.
다왔는가 했는데. 한 번 더 내렸다.
지금 삿시틀에는 물방울들만 오종종 매달려 있고 햇살은 눈부시다.
눈이 내리고 쌓이고 녹고 시간따라 조건따라 모습이 다르다.
저 물방울은 눈이었고 바람이었고 주증기였고 먼지나 바람이기도 했던
시간들을 거쳐서 지금은 다만 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