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좀 읽는 진지한 독자들에게 권한다'는 장강명의 추천사가 붙은 책.
'진지한' 독자가 되는 일이 그리 호락한 일이 아님을,
읽는 내도록 몰입이 어려운 책이었다.
이 책은 제호처럼 독자와 독서에 관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볼 수 있다.
서양문학을 근간으로 하는 작가의 독서력뿐 아니라.
작품이나 인물들에 대한 본인의 식견 덕분에
그저 놀라움으로 그의 문장속을 유목민처럼 여기저기를 다녀온 기분이다.
직업을 독서가라고 자칭할 만큼 책을 읽고 자신의 넓혀간 부분들
그의 한 면이라도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었다.
'아는 만큼 읽힌다'는 아쉬움, 즉
해석이 딱 내 수준이라는 생각때문에 씁쓸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알고 싶어하는 자'로 남고 싶어서
몇자 남겨두는 것으로 다음에 읽을 거리를 기약해 두고 싶다.
왜 메타포인가
인간은 '세상이 스토리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간주하는 유일한 종이다.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도록 진화한 생물로 '인지된 자아'와 '인지된 세상'을 마치 문리적 판독이 필요한 대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의 삼라만상이 학습과 이해를 요하는 코드로 기술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언어는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의미와 공간을 넓히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메타포에 기댄다. 메타포란 A 분야의 경험을 이용하여 B 분야의 경험을 환히 비추는 방법으로, 언어의 직접적인 전달 능력이 부족함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타포의 힘을 '청중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청중이 메타포의 주제에 어떤 공유된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세상은 신이 인간에게 읽힐 요량으로 편찬한 책이라 할 수 있다.
키케로는 [웅변론]에서 "의복이 처음에는 보온용으로 발명되었지만 나중에는 치장과 품위를 위해 사용된 것처럼, 메타포 역시 처음에는 언어의 빈곤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언어의 유희를 위해 널리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키게로는 언어의 빈곤 즉 화자(또는 필자)의 경험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언급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문제점 때문에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메타포를 장식용으로만 사용한다면, 언어를 풍요롭게 하는 본질적 힘이 약화될 것이다.
사회는 세상 = 책 이라는 기본적인 메타포를 기반으로 하여 일련의 '파생적 메타포'를 줄줄이 만들어 냈다. 첫 번째 메타포는 독자 = 여행자라는 메타포다. 인생은 여행이므로, 세상이 책이라면 인간은 세상이라는 책(세상 책)을 읽는 독자이며, 종이책을 읽는 독자는 여행자라고 할 수 있다. 종이책을 읽는 독자는 마치 세상을 여행하듯, 책장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피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그러나 때로는 묵묵히 책장만 넘기는 독자들도 있다. 마치 경치와 거주자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터덕터덕 걷는 여행자처럼 말이다. 그런 여행은 단순한 공간 이동에 불과하고, 그런 여행자와 독자들은 여행과 독서의 참맛을 모르는 '무늬만 여행자''무늬만 독자'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메타포는 서재='상아탑' 이라는 메타포다. 오래된 문헌에서 탑이라는 메타포는 순수함과 순결함을 의미하였으나 수세기 후에 탑은 독자의 상아탑으로 변질되어, 비활동적이고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부정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탑은 여행자와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세번째 메타포는 독자='책벌레' 라는 메타포다. 책벌레라는 개념은 좀목에 속하는 곤충에서 유래하는데. 이 곤충은 종이와 잉크로 구성된 책을 실제로 먹어 치우는 벌레로 일찍이 알렉산드리아 시대부터 "도서관의 청소부"로 악명을 날렸다.
인간이 사회 규범을 따르는 사회적 동물임을 감안하면, 전자책 등의 기술이 아무리 고도로 발달해도 사물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그것을 단어로 표현하고, 그 단어들을 통해 경험을 서로 주고 받음으로써 세상의 이치를 배우는 원리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인간은 자의식을 가진 존재다. 상상과 희망을 통해 살아남으려고 독특한 언어 능력을 진화시켰고, 그중 하나가 바로 메타포다. 따라서 인간의 재능에서 변하지 않는 부분, 글쓰기와 독서 행위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원리, 즉 메타포를 위해 사용되는 어휘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고 교훈적이다.
1부 여행자로서의 독자
독서= 세상을 인식하는 행위
상상할 수 있는 경로를 모두 여행하더라도 영혼의 한계를 발견할 수는 없다.
영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만큼 심오하다. -헤라클레이토스. 조각글 35
세상이라는 책
우주라는 신비로운 책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피조물이라는 살아 움직이는 낱말들을 통해 저자의 탁견을 읽어라 -루이스 데 그라나다. [믿음의 상징]
책은 천의 얼굴을 가진 존재다. 기억의 저장소, 시공간적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 계승과 창조의 장, 자신 및 타인의 경험의 보관소, 깨달음과 행복과 (때로는) 위로와 원천, 과거. 현재. 미래 사건의 연대기. 거울, 동료교사 [사자의 혼령을 부르는] 심령술사, 엔터네이너.... 책은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변신라며 핵심적인 개념과 행동의 메타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유년 시절의 경험을 예로 들며 "읽기와 쓰기 기술은 분명히 훌륭한 것이지만, 우리가 헛된 공상을 믿도록 유도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잘못된 독서'와 '올바른 독서'를 구분했다. 예컨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읽다보면 독서에 수반되는 일반적 문제점과 직면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독자가 쾌락과 교훈에 각각 얼마만큼의 가중치를 부여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나는 아이네이아스라는 영웅의 방황은 기억했지만, 정작 나 자신이 일탈행위는 반성하지 않았다. 나는 사랑 때문에 자살을 선택한 디도의 죽음은 애석해했지만, 신이 명령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이네이아스가 걸었던 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흠을 떠올리게 하는 메타포적 행로였지만, 베르길리우스 시에 등장하는 아이네이아스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반면교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쾌락과 교훈이라는 양자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음을 솔직히 인정했다.
우리는 텍스트를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순간과 직면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모든 독자는 안락의자에 앉아, 일렁이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시간의 섬으로 간다. 마치 로빈슨크루소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독서 행위와 '화살처럼 빠르게 나아가는 삶'의관계를 잘 이해했다. 독서란 텍스트를 독파하는 여행이다. 여행을 통해 탐구된 영역은 기억의 영역에 저장되고, 그 과정에서 미지의 영역은 점자 익숙한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흐릿해진다.
텍스트를 여행하는 독자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시인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된다. 이미 시의 일부분인 것이다. 첫 번째 판에 적혀 있는 첫 번째 단어에서부터 독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길가메시와 동행하는 여행자가 된다.
- 두 가지 이상의언어와 문화가 몇 세기 동안 공유되고 중첩되면, 고대설화를 둘러싼 상이한 해석들이 지속적으로 추가되어 내용이 풍부해지기 마련이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스토리는 변호하고 확자오디었는데. 다시 쓰기와 읽기를 통해서보다는, 원문에 손을 대지 않고 의미를 추가하거나 제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독자들 자신이 변하면서 스토리를 여행하는 행위도 달라져, 길가메시와 독자들이 여행하는 풍경이 변했다.
인생길
세상이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인 것처럼, 책은 우리가 여행할 수 있는 세상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초기 설교에서 이렇게 지적햇다. "우리의 영혼에는 발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과 인지이고, 다른 하나는 정서와 사랑입니다. 올바른 길로 가려면 양쪽 다리를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독서란 일종의 여행이며, 지리적 여행이 아니라 정서적 여행이다"
[신곡] 말미에서 단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한다
아, 말이란 얼마나 약하며,
내 생각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가!
내가 본 것이 그러하니,
그저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해야 하리라.
인터넷 여행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책장에 적힌 글들을 한 줄씩 깊고 철저하게 음미하며 과거, 현재. 미래의 장서들에서 흘러나오는 메아리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에게 독서란 여러 개의 경험사이를 순차적으로 이동하는 과정으로 '지금껏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의식하고 기억을 통과하여 욕망을 향해 나아가는 유목민적 독서를 뜻했다.
2부 상아탑 속의 독자
독서 = 세상을 멀리하는 행위
* 세상의 소음에서 탈출하여 은밀한 길을 찾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평온한가!
드문드문 발견되는 현자들의 정겨운 모습.-프라이 루이스 데 레옹 [고독한 인생의 노래]
우울한 탑
소위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아직 즐길 줄 모른다면,
그건 고작해야 어정쩡한 삶일 뿐이다.
굶주림에 떠는 왜소한 자아에서 해방되어
이 웅장한 삶의 공간으로 들어오라.
우리가 목도하는 영광에 사로잡히지 말고
생기발랄한 생각을 하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열정을 품거나 에너지를 발산하지 말고
학구적이되 영감을 억제하고, 야먕을 품되 조심하고,
세심하되 눈을 낮춰라.-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학구적인 왕자
세익스피어는 '감각 대상에 대한 집중'과 '정신적 산물에 대한 명상' 간에 균형 (실제 세계와 상상 세계 간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다. 햄릿의 경우에는 이러한 균형이 파괴된다. 그는 즉각적인 명상을 통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형태와 빛깔을 인식하므로, 그의 생각과 공상적 이미지는 일반인들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뚜렷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햄릿의 과도한 지적 활동을 목격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태도와 행동,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증상 및 특징에 더욱 큰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세익스피어는 충동적 행동을 유발하는 상황에 햄릿을 몰아넣는 경향이 있다. 햄릿은 용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감성 때문에 갈팡질팡하고 생각이 많아 결정을 뒤로 미루며, 각오가 지나친 나머지 행동력을 상실한다.
책벌레다.
현미경을 통해 관찰한 것인데
고놈 참 고약하게 생겼다
책을 먹고사는 놈
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일컬어서 붙여지기도 하지만
참 징그럽다.
오래된 책에서 가끔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혹시 이녀석의 분비물은 아닌지 ㅎㅎ
'책벌레란 독서를 통새 지혜를 얻지 못하고, 마치 좀벌레가 책을 먹어 치우듯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독자들은 생쥐나 시궁쥐라고 조롱받기도 하는데, 그들에게 책과 인생은 영혼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아니라 헛된 욕심을 채우는 사료에 불과하다.'
3부 책벌레
독서= 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
책으로 빚은 피조물
나는 행복을 찾아 모든 곳을 헤맸지만 결국 어느 한구석에서 책을 읽다 행복을 발견했다
-토마스 아 캠피스
니콜라 드 에르브레는 기사도 문학작품인 [갈리아의 아마디스]에서 독자들에게 '작가가 제공하는 스토리에 만족하고, 진위 여부를 따지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한다.
날카로운 판단력을 타고난 친절한 독자들이여,
이 책에서 멋진 구절을 발견하거든
멋진 스토리와 문체에만 만족하고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는 따지지 말아 주세요
마법에 걸린 독자
플라톤은 "세상에는 글로 옮길 수 없는 진리가 있다. 설사 글로 옮기더라도, 단지 읽기만 해서는 그런 진리에 관한 지식을 섭취할 수가 없다. 수많은 노력과 경험을 거친 후, 갑자기 스파크처럼 튕겨 일어나 영혼에 옮겨 붙은 지식이라야만 스스로 떠먹을 수 있다. 이 말은 수세기에 걸쳐 반복적으로 인용되면서, "독서를 통해 가장 진실하고 심오한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독서로 삶을 풍요롭게 만들겠다고 폼 잡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는 주장의 논거로 사용 되었다.
그러나 글로 옮겨진 경험을 습득하는 것은 직관적 학습보다 훤씬 더 든든하다.
에필로그
삶을 위한 독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읽지만, 나는 읽기 위해 산다.-로건 피어설 스미스 [뒤 늦은 생각]
엠마, 돈키호테, 안나라는 세 인물이 엇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 사람의 독서 스타일을 비교해 보자. 먼저 엠마 보바리는 책을 게걸스럽게 읽는 타입이다. 소설 속의 삶을 자신이 삶으로 여기고, 자신이 발자크나 쉬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이라고 상상한다.
다음으로 돈키호테 역시 책을 게걸스럽게 읽고 (나름 적당하다고 생각하는)특정 소설의 어떤 것을 모방하는 스타일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란셀롯이나 아마디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
마지막으로 안나 카레니나는 셋 중에서 주관이 가장 뚜렷하다. 그녀는 자신이 읽는 소설에서 이상적인 캐릭터나 행동 대신 가상적인 삶을 본다. '저건 실제로 불가능한 삶이야' 라면서 등장인물들의 삶을 비웃는다. 그녀가 사는 곳은 소설 속이 아니라 현실이고, 그녀가 사는 삶은 메리의 삶이 아니라 안나 카레니나의 삶이다. 소설 속의 세상이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기는 하지만, 독자에게 삶의 행동 본보기를 제시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삶은 결코 독자의 삶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참고만 할 뿐이다.
소설을 읽고 이해하는 게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안나 카레리나가 자신과 메리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메리를 이해하는 것처럼, 독자들은 자신과 안나 카레니나를 동일시 하지 않으면서도 안나카레니나를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소설은 불가능하며, 사회 자체도 존재할 수 없다. 즉 니콜라 드 에르브레가 말한 것처럼 "문체에 만족하면 소설이 실화인지 아닌지는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블래키 버밀은 한 매력적인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문학 작품의 캐릭터들은 유사인 동시에 망원경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멋진 전망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나락에 빠뜨린다. " 그러면서 블래키는 묻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길보다 지도와 나침반에 집중하고, 먼 거리에 있는 행성보다 망원경에 집중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플라톤의 [이온]에서 소크라테스가 음유시인 이온에게 던진 질문도 같은 맥락이다. "물자체보다 그것을 표현하는 데 더 관심을 갖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가?" 버묄은 이온의 대답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독자들이라면 음유시인이 금세 정답을 말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 연의 시, 한 줄의 산문, 하나의 아이디어나 스토리가 갑자기, 불현듯, 심오하게 우리를 감동시켜 어렴풋하고 반쯤 반쯤 직관적이고 공언되지 않은 뭔가를 드러낸다. 그것은 저자와 은밀히 내통한 독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운문, 문장, 스토리는 '물 자체'보다 우리의 관심을 더 사로 잡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햇빛속의 두더지처럼) 지각력이 나약한 피조물이라 감각에 현혹되기 쉽고, 심지어 문학적 언어는 불확실하고 신뢰할 수 없는 도구라 할지라도 잠깐 동안 세상의 한 면을 기적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세르반데스의 [돈키호테]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실존 인물의 희미한 그림자일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들의 인상은 독자를 압도하기에 충분하다. 엠마는 완전히 압도되어 낭만의 성속에 살고, 알론소 키하노의 경우에는 멍한 상태에서 풍차를 향해 돌진다. 안나 카레니나는 한 단계 뛰어넘어 자기 방식의 삶을 산다. 종국에는 죽음이 찾아올지라도,
세르반데스처럼 플로베르도 '픽션의 본질적 힘'과 '물 자체의 경험을 재창조하고 전달하는 픽션의 이상한 힘'을 직감한다. 또한 "우리는 물리적 행동"이 아니라 '그 행위를 묘사하는 스토리'를 통해 행동 강령을 배우며, 실생활에서 행동의 원인과 결과는 다양하다."는 점을 안다. 실생활에서 행동의 원인과 결과는 다양하다."는 점을 안다. 우리는 테스트에의해 세팅된 무대에서 여러 가지 분장을 하고 연기하는 자아를 관람하며, 그 과정에서 종종 뭔가를 배운다. 이러한 픽션이란 일종의 본보기다. 그리고 외견상 무한해 보이는 플롯이 실생황에서의 가능성을 모두 망라하지 않을지라도, 그중 일부분, 특 특정 에피소드나 캐릭터, 스토리는 우리 삶을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세기 초반 잉글랜드 작가이자 변증가였던 채스터톤은 이렇게 지적햇다. "모든 책에는 어딘가에 대여섯 개의 핵심 단어가 묻혀 있고, 나머지 단어는 모두 그 단어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였다." 독자들이 독서를 통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환경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대여섯 개의 단어를 통해서 일 것이다. (그 단어가 무엇일지는 구체적으로 사람마다 다르다)
여행자가 됐든 상아탑 거주자가 됐든, 책벌레가 됐든 각각의 메타포에 부여된 의미는 오랫동안 변화되어 왔다. 책벌레라는 메타포는 앵글로색슨 격언에 나오는 '게걸들인 독자'에서부터 [요한 게시록]에 나오는 '말씀을 순종적으로 받아 먹는 자' 그리고 '소망하는 엠마'에서부터 '소원을 성취하는 안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됐다. 책벌레가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독서하는 피조물'이다. 단어를 섭취하고,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어가 존재의 수단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단어를 통해 현실을 파악하고, 자아도 확인된다.
'에필로그'가 한 호흡에 읽힐만큼 힘있다.
결론을 이렇게 잘 도출해 냈는데 앞부분은 왜 그렇게 안 읽히던지
물론 나만 그럴 수 있다. 딱 내 수준이니까.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쓰셨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독자로서의 자세랄까
취사선택의 문제지만 그래도 이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나는 어디쯤인가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급독자로 남고 싶은 욕망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즐거운 여행이었다.
201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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