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향기

일년 만에 온 엽서

구름뜰 2018. 3. 14. 10:40


 




깨를 줄세워 놓으면 이런 모양일까. 돋보기라야 읽을 수 있는 손글씨 엽서가 우편함에 꽂혀 있었다. 잘못 배달된 것이 아닌가 들여다 보는데, 엽서는 1년 전 작은 아이가 1년 후의 자신에게 보낸 글이다.


작년 이맘 때 작은아이는 취업하고 싶었던 은행의 마지막 관문에서 고배를 마신 뒤였다. 금융권 자격증 취득을 위해 휴학까지 하며 준비한 여덟개의 자격증, 토익, 봉사활동, 은행 인턴, 자소서까지 아이도 나도 은근히 기대를 했던 터였다. 연줄도 없었지만 끈 떨어진 연처럼 이젠 어찌하나 싶을 때 아이는 정동진 일출을 보고 와야겠다고 했었다.


 아이가 지원한 은행은 지원자를 외주업체에 맡겨 위탁관리를 하고 있었다. 천명 넘는 지원자 중 합격자의 2배 수를 뽑아 은행으로 넘겨주기에 4차까지 못가면 그곳 사람들은 만나보지도 못하는 구조였다. 내 집에서 일할 사람을 다른 집 사람이 뽑는 것 같은 시스템이지만, 그들의 전문성을 신뢰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어쩌면 더 공정하게 잘 뽑아질 것이라는 믿음 말고 우리가 가질 기대와 희망은 없었다.  


 2차 합격 후, 은행에 근무하고 있는 선배를 찾아가 남은 면접에 관한 조언과 근무조건 만족도를묻기도 했다. 창구도 궁금하다며 공단지점과 시내, 대학가 외곽 아파트촌까지 둘러보았다. 동네마다 분위기는 달랐다. 공단 쪽은 한산했지만 이런 지점엔 큰 돈이 오갈거라고 했다. 자신이 창구 직원이인 듯 동선을 보기도 했고, 청원경찰의 궁금한 눈빛에는 싱거운 몸짓을 보내기도 했다. 3차 합숙 면접을 마치고 왔을 때 살아오면서 가장 긴장했던 1박 2일 이었다며 잠이 오지도 잘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작년 강원랜드를 시작으로 금융권은 물론 공공기관까지 채용 비리가 보도 되면서 작은 아이가 지원한 은행도 그에 해당된다는 걸 보도를 통해서 알았다. 기막힌 현실에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최선을 다한 젊음이 이유도 모르고 새치기 당한 것 같은 박탈감은 어떻게 누가 보상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아이가 첫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취업난이라는 긴 터널속으로 접어들게 되는 건 아닌지 어두운 생각이 먼저왔다. 하지만 아이는 정동진엘 다녀온 뒤 준비 해온 4년이 아깝다며 한번만 더 지원해보겠다고 했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라는 아버지의 권고에 나이들어 돌아보면 지금 1년은 긴시간이 아닐거라며 제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대학 진학으로 집을 떠난 뒤 부모역할은 아이의 선택을 기다리고 응원해주는 것 말고 없었다. 아이를 볼 수 없지만 불안보다는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건 믿음이라는 것, 돌아보면 우리는 믿는 척 했을 뿐 아이의 대학생활은 우리에겐 불안을 추스르는 시간 이었다. 불안이 전가되면 아이는 부모의 불안까지 떠 안게 되므로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일출을 보며 "할머니 취업하게 도와주세요" 라고 하늘에 계신 할머니에게 기도했다던 녀석이 1년후 자신에게 보낸 엽서에는 그때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일출


시간이 다르고 계절이 달라도 해는 뜬다

비가 오고 구름이 져도 해는 뜬다


그러니 너도 포기하지 마라

지금 당장 비가 오고 구름에 가려져 두렵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라


언제나 그랬듯이 해는 떠올라

웅장하고 찬란하게 그 빛을 드리울 것이다


그러니 너도

절대 포기하지 마라


2017,3,7




 


얼마나 길 지 모를 터널, 저편 어디쯤에 반드시 있을 빛, 그 빛을 일출로 확답받고 싶었을까. 퇴근해 돌아온 아이에게 엽서를 내밀었더니 "아! 작년 이때는 이랬어!" 라며 지난 일년 전을 옛일로 여기는 모습이다. 여행 이후  "엄마 여기만 붙으면 은행 떨어진 게 대박이야!"라던 아이는 운좋게 합격하여 지금은 사회초년생이 되었다. 

 

양복에 코트까지 입고 출퇴근하는 걸 지켜본 지난 겨울은 내가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보다 설레던 날들이었다. 병아리복 입고 유치원 가던 날과는 다른 든든함이 있다. 속옷 준비해주고 셔츠 다림질 외엔 해줄게 없는 지금. 살갑지도 다정하지도 않지만 묵묵히 제 길을 가는 게 가치있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오늘도 무심한 척 지켜볼 뿐이다. 엄마손 필요할 때만 다정해지는 녀석을 보면서 그래도 필요한게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봄볕이 유독 따스한 삼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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