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작 작품집엔 대상작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작가의 자선 대표작 '정읍에서 울다' 문학적 자서전 '절망한 사람'.
우수상 수상작 다섯편이 함께 실려있다
.
구병모 한아이에게 온 마을이
정찬의 새의 시선
방현희 내 마지막 공랭식 포르쉐
조해진 파종하는 밤
정지아 존재의 증명
해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공통점은
한 번 읽어서는 무슨 내용인지 간파가 쉽지 않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정도 읽어야 스토리나 문장이 선명해진다.
안개속에서 무언가 찾아가는 느낌이랄까
반복할수록 선명해지는 문장을 넘어서
작가의 의도까지 잘 보이는 지점이 생긴다.
결국 가장 잘 읽기는 반복뿐이라는 생각이다.
매년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중 거의 공통적으로 나오는 얘기도
만장일치로 대상작을 뽑았다는 내용이다.
그만큼 대상작은 대체로 탁월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얘기도 이런 문학부분에서는 해당되지 않으니.
작품으로 평가받는 다는 것 얼마나 명예로운 일일까.
대표작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역시 읽을수록 좋다.
혼자 보기 아까운 문장 추려서 올려 본다.
1
청년은 감정 표현이 서툴렀고 지금도 여전히 서투른 그와 비슷해 보였다. 그는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이 물 컵조차도 순수한 강철은 아니었다. 니켈과 크롬이 포함된 합금이었다. 그의 감정도 언제나 합금이었다. 순수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살아야 했고 어떤 감정이 엄습하면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전혀 다른 감정을 쥐어짜낸 뒤 엄습하는 감정을 방어했다. 그런 감정들은 뒤엉켜 하나가 되어 동시에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었고 이렇게 합금처럼 태어난 감정들을 뭐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아마도 그것을 가리키는 가장 적절한 말은 괴물일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서서히 괴물이 되어갔다.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그리고 남들처럼 꿈을 꾸지 않으려고 애쓰게 되는 순간이 왔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을 지나니 어느 순간 꿈을 포기하기 위해 애쓰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서투르다. 내 경우 젊을 적엔 더욱 그랬다.
어떤 감정도 오롯이 나를 위한 감정은 없었으며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자유로운 마음 상태나 몸 상태는 없었다.
늦은 귀가를 신경쓰는 아버지 때문에 친구들과 있으면 불안했고
집에 들어오면 친구들보다 먼저 들어와야 했던
억압에 대한 불만이 똬리 틀기도 했다.
내 아버지도 가끔 불쑥 불쑥 화를 냈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화덩이를 쏟아내기도 했다.
왜 저렇게 소심할까 싶은 생각은 내가 어른이 되고도 한참 동안이었다.
아버지의 그 근원이 무엇때문인지 안건 칠순이 넘어서 였는데
자라면서 할아버지에게 당한 부당한 억압이
아버지 삶에 뿌리깊게 내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화를 통해서 였다.
왜 아버지는 칠순이 넘도록 그런 얘기를 하지 않으셨는지..
그것도 글쓰기라는 방편을 통해서 알게된 거였다.
글쓰기의 이로룸은 칠순이 된 노인도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스스로 만들게 해 주었다.
지금이 좋은 건 내가 나를 결정하는 현재의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꿈으로 미뤄두지 않아도 되는 현재를 살수 있고 이런 글을 쓸 수 있어서 이기도 하다.
언젠가 아내가 그에게 당신은 한 번도 아이였던 적이 없는 사람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나면 소리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서투른 게 아니라 감정을 드러내 본 적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일들이 그를 흔들었다. 그에게 발을 걸고 그의 팔을 잡아당기고 그의 발목을 옭아매려 했다. 그는 넘어지지 않고 끌려가지 않고 붙들리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살아왔다. 타인의 눈에 그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는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부동을 고수했을 뿐이다.
2
음식 재료만 만졌을 뿐인데 구역질이 난다는 건 내 배 속에 아이가 들어설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다른 무언가가 생겨났다는 뜻이겠지. 나는 무얼 잉태해버린 걸까. 내가 이 나이에 잉태할 수 이는 건 분노 말고 뭐가 더 있을까. 옛사람이 흔히 한이라고 불렀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한이라는 말은 왠지 체념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여겨져, 나는 오래도록 체념해 왔으니 체념이 다져지고 굳어져 생긴 한이라 하기에는 억울해. 그렇게 굳어지고 굳어진 체념이 더는 체념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왔을 뿐이야. 그러니 분노 말고 뭐가 더 있겠어. 그런데 대체 무얼 향한 누굴 향한 분노지. 내가 나 아닌 다른 누구에게 분노를 품을 수 있겠어? 결국 그건 나일 수밖에. 어쩌면 그가 느낀 것이 진실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결국이다.
알아야 하는 건 자신뿐.
우리가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접하는 것도 결국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종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성숙된 인식은 삶을 풍요롭고 여유롭게 만든다.
한 번 살다가 가는 삶
하루살이에겐 하루이고 인간에겐 조금 더 길다는 것일 뿐
결국 누구나 죽음이라는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가고 있다.
지금이 좋은 건 살이있기 때문이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것으로 족하다.
그것 뿐이다.
-음식을 접시나 그릇에 담아 내놓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을 주물러 한 편의 시를 써낸 것처럼 뿌듯했다.
요리를 이렇게 예쁜 문장으로 다듬어 낸 걸 나는 이적지 본적이 없다.
내가 그동안 수많은 시를 써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시들은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가 만든 음식들은 자주 마음에 들었으므로
묘한 자만심 까지 생기게 하는 힘있는 문장이다. ㅎㅎ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시 한 편 한 편을 먹어본 사람들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그리고 나 보다 맛있게 먹어주는 당신이 있을 때
시가 얼마나 사람을 살지게 하는지를.
-처음부터 조합에 가입하지 않았던 사람들보다 탈퇴한 사람들이 더 아니꼬운 모양인지 신경줄이 굵기로 유명한 숙자 언니나 영주 언니조차 그이들과 삿대질하며 다투기 예사였다.
인간이 나약한 건 이런 모습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참 어긋난다.
본질이 뭔지를 자주 잊어 버린다.
애초부터 관심없었던 사람보다
함께하다 탈퇴한 사람들이 더 삿대질 받는 세상
우리가 여기서 봐야 할 본질은 뭘까.
조금이라도 노력한 이와
노력하지 않는 이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에서 기본적으로 가지는 모순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일상의 모습들에도 이런 상황이 얼마나 많을까
- 남편의 진심을 한 번만이라도 직접 남편의 입을 통해 듣는다면 마음이 후련할 것 같았다 설령 빈말이어도 좋으니 걱정이 되어서 왔다고 말해준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 영양사든 조리장이든 김실장이든 시어머니든 시누이든 그 누구와 얽힌 이야기든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살아오면서 하소연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치매가 심해진 시어머니 앞에 앉아 넋두리를 풀어낸 적은 있어도 소소한 일상을 살아온 이력에 버무려 간식을 먹듯 나누어 먹을 사람이 그의 곁에는 없었다. 그는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외롭다는 걸 잊어버렸고 그걸 잊어버렸기에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가 살아오면서 겪은 절망의 감정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밤마다 감옥을 나서는 꿈을 꾸었다가 아침에 깨어나 감옥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쓸쓸해하는 종신형 죄수처럼.
곁에 누가 있다는 것,
일상의 소소함을 나눌 수 있는 대상
행복은 거창한 게 아님을..
습관이나 관성이 우리의 현재 모습을 만들었으므로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해보지 않으면 우리는 습관대로 산다.
지금 삶이 행복하더라도 돌아보아야 겠고
불행하다면 더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는 아들과 남편이 어떤 방식으로 다투었는지. 아들이 한사코 제 아비와 달라지려 애쓸수록 사실은 얼마나 제 아비와 똑같아지는지, 그래서 아들은 자신의 행동이 제 아비와 똑같다는 걸 꿈에서도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 남편이 하던 것처럼 방문을 발로 차고 말은 하지 못한 채 씩씩대다가 집을 나가 버렸다고 고자질을 하며 마음이 평온을 찾아갔다. 말을 마치자 더는 할 말이 없었는지 아직 하지못한 말이 저 가슴 바닥에 수천만 톤이나 남아 있는 것 같아 서러워졌다
화자인 며느리가 치매 걸린 시어머니에게 하는 넋두리다.
한사람이 자기의 얘기를 들어줄 한사람이 없어서
시어머니에게 털어 놓는 것이다.
이 사람에게 진짜 아버지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사람은 없었으니까. 이 사람은 결코 모를 거야. 우리 아들에게 절망을 준 자들이 바로 자기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걸. 일손이 서투르다는 이유로 때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때리고 사내자식이 약해빠져서 별일 아닌데도 질질 짠다고 때렸어. 때려도 대들지 못하니까 계속 때렸지. 우리 아들을 깊은 슬픔에 빠뜨린 자들이 바로 자기 같은 자들이라는 걸 이 사람은 결코 모를 거야. 그렇게 맞고 굴복하고 순종하면서 어른이 되는 거라고 믿는 사람이니까. 자기도 그렇게 견뎌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현명한 태도라고 생각하니까. 이 사람이 지금까지 한번도 오판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진정한 의미에서 한 번도 판단하지 않은 덕분이었어. 그 덕분에 이 사람은 고요하게 낮게 즐겁게 살아왔지. 그게 행복인 줄 알면서 말이야....
내가 당한 아픔이나 슬픔
그 어떤 근원적인 고통외에 관계에서 오는 어떤 고통이 습이 된 것들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내 선에서 그 습을 끊어버려야 한다는 것.
대체로 우리는 그대로 내 자녀에게 전가시킨다.
무심코.
예를 들어서 내가 미워하는 시어머니나 시고모가 있다면
그것을 무심코 동서나 아이들이나 친구들에게 전가시켜서
그들이 내가 미워하는 대상을 만나보지 않았음에도
전가받은 감정으로 선입견을 가진걸 보게 된다.
그런일에서 가해자는 어쩌면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내 감정을 내 안에서 끊어버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식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이 부모이고.
그 부모의 삶을 싫어하면서도 그대로 닮아가는 자식을 보면...
슬픈일이다.
3
남자는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고 여자는 상재방이 숨긴 감정을 간파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부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감정을 숨겼다고 해서 감정이 없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고 아무리 꽁꽁 감춘다 해도 그곳으로 부드럽게 손을 가져가 얼루만져줄 수 있어서였다.
1, 2 ,3 세편의 작품을 읽은 느낌이다
3편이 남자와 여자가 처녀 총각으로 처음 만는 장면인데
마지막에 장치되어 있다.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제호처럼
이 책은 과거를 돌아보는 현재의 나와 그가
돌아간다면 다시 그렇게 살게 될까
현재는 성숙된 인식을 가졌지만 모든 것이 해체된 상황이다.
과거는 꿈같고
지금도 꿈같은 상황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가보지 못한 미래를
현재로 소환해와서 돌아보도록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참으로 탄탄한 문장이다.
읽을수록 맛나는 문장이다.
작가의 문장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봄비가 촉촉히 내리는 아침이다.
며칠 여름날 같더니 다시 예년 날씨보다 싸늘할 거라고 한다.
그러니 춥더라도 이해하고 덥더라도 이해하지..
지금은 다만 여벌옷이 필요할 때이므로......
20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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