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깓 활동 자제하라는 당부가 뉴스마다 나오는 날이었다. 부모님과 여행 한 번 가자던 약속이 동생과 있었고, 올해가 가기전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해서 한파는 뒷전이었던 그제였다.
어디로든 떠나자고 준비하시라고 일곱시에 전화를 드렸더니, 아버지는 벌써 새벽 운동을 다녀오신 뒤였다.
대구로 갈 때는 포항으로 갈 생각이었다. 네비에 목적지를 입력하려는 데 아버지는 "족보도 가져와야 하고 산소도 가보고 싶으니 거창으로 가자"고 하셨다. 덕분에 고향 나들이가 되었다.
부모님에겐 돌아가신 조상님이 신앙같다.
올 여름에 큰엄마까지 더해진 산소를 엄동설한에 가고 싶어하는 마음, 뉘라서 말릴 수 있을까. 그 마음이 신도들이 절이나 예배당에 가는 마음과 다르지 않음은 두분 다 같다.
부모님이 위안 받고 힐링 받는 곳, 의지 삼는 곳이 당신 부모님이라는 걸 나는 뵐 때마다 느낀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삶을 지탱하는 중심으로 사신다. 언제나 보고 계실거라는 도와주실거라는 믿음. 그 믿음이 당신 삶을 얼마나 성실로 선의로 이끌었는지 나는 잘 안다.
거창군에서 3번 국도를 타고 주상면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식당이다. 거창에 사는 친구와 한 번 간적이 있어서 전화로 물어서 예야을 하고 찾아간 곳이다.
세개의 산과 두개의 물' 어떤 뜻일까.
자리 잡은 이곳과 관련 있는 상호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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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중양시장에 들러 떡과 막걸리를 준비했다. 이런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고 저렇게 좋아하시는 걸 보면 자주해야지 싶다가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 자주 내지는 못하고 사는 것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앞으로 합장한 큰아버지와 큰엄마 묘소다.
일하는 모습 말고는 기억에 없는 할아버지. 리어카에 짐을 한가득 싣고 우리가 노는 골목을 질러 갈때는 언제나 "비켜라!' 라고 고함을 지르셨었다. 아이들은 우리 할아버지를 호랭이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아마도 그 무거운 짐이 한 번 시면 동력을 잃어버릴까. 그러셨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뒤에서 보면 짐을 실은 리어카만 움직이는 마술 같은 모습이었다. 언제나... 무시로 길을 다니시거나 볕 좋은 곳에 양지쪽에서 쉬는 모습을 본 기억도 없다. 어찌 그리 일만하시다 가셨는지.
할머니는 곰방대에 담뱃재를 탈탈털어내시고 다시 담뱃잎을 꾹꾹 우겨넣어 담배를 피우시던 모습만 기억으로 남아있다. 언제나 할머니방에는 담배냄새가 자욱했었다. 그게 할머니 방에서만 나는 냄새라서 그때는 할머니 냄새인줄 알았었다. 가끔은 옛날 얘기도 해주셨는데. 돌아보면 할머니가 지금의 내나이였을 터인데.. 대놓고 담배를 즐기신걸 보면 ... 엄청 많이 변한 풍속도이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커피 마시듯이 여성들도 담배를 피던 시절이기도 했다고 엄마는 말씀하시기도 했다. 정작 우리 엄마 세대부터는 담배를 피우는 이가 없었다. 고향마을 풍경은 적어도 그랬다.
이곳은 고향마을 아래 위지한 공동묘지다. 아버지는 이곳으로 오시고 싶어하신다. 건강하신데도 이곳 얘기를 근간에 자주 해오시더니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으셨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여기 서 보라고 이렇게 전망좋은 곳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화장은 싫다고 두번 죽는것 같아 싫으니 반드시 묻어 달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아버지 칠순때 하신 말씀 "더도 말고 팔십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 셨는데 올해 팔순을 맞고도 이렇게 건강하시니 얼마나 복인지 모른다.
큰아버지 큰엄마는 안계시지만 큰집은 사촌 큰오빠가 지키고 계신다. 작은 아버지 두분도 여전히 고향을 지키고 계신다. 집성촌이라 오촌 아주머니들도 게신다.
큰집을 지키고 있는 큰오빠가 1년 전에 담았다는 더덕술을 내오셨다. 더덕이 얼마나 많은지 ...
뚜껑이 열리지 않아 애 먹는 걸 보면서.. 재밌어서 몇컷 찍어보았다.
손 네개 발 세개는 작은아버지 두분과 큰오빠까지 합세한 세분의 몸짓이다. 이런 정겨운 모습을 언제 또 보게 될지.. 사랑방같은 큰집에서 엄동설한에 이런 정을 나누고 왔다.
이 족보 덕분에 고향나들이가 성사된 셈이다.'
집성촌이라 아직도 고향을 지키는 친척들이 많으니 그것도 복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곳 부모님이 태어나고 자란곳 그곳이 어찌 꿈엔들 잇힐까. 아버지가 그곳으로 가자고 한 것이 어찌 이 족보 때문이기만 할까,
고향은 아버지에겐 아버지 세상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일찌기 떠나와서 고향에 대한 향수가 남다를 것이고. 이제 묻힐 곳을 생각하매 다시 고향으로 가보는 이런 길이 얼마나 착찹하실까.
겨울바다도 대게도 구경도 못했지만, 부모님과의 여행은 뜻깊은 시간으로 남았다. 마을회관에서 엄마보다 나이 많으신 친구들의 부모님도 뵈었다. 내가 어릴적 어른이셨던 분들은 모두 노쇠하여 금방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회관에 앉아 있다보니 옛모습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삼십 년 만에 뵙는 분도 있고. 일년 이년 만에 뵙는 분도 있었다 그분들께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어 있을지. 코흘리개 어린아이 쯤일까. 아니면 좀 자란 모습일까. 엄마를 부를때 맏이인 내 이름으로 불러서 나를 모르는 어르신도 내 이름은 알고 있는 고향..
각각 기억하는 모습은 같을 수 없을 테고, 그분들 또한 내겐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어 있다. 언제 어떻게 또 뵐지 모르지만 건강하시게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셨으면 좋겠다. 부모님 두분도 건강하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내년에는 좀 더 자주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워보아야 겠다. 201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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