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사상이 오늘까지 전해진 까닭은
부처님 열반 뒤에 제자들이 모여 부처님 말씀을 결집했기 때문이고,
소크라테스가 오늘날까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 철학자로 남은 까닭도
플라톤이 스승 사상을 적바림했기 때문이며,
선불교를 일으킨 육조 혜능 스님 사상도 뒷사람들이 풀어내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불교 핵심사상으로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침 2010년은 우리 선조들이 부처님 말씀대로 살려고
부처님 말씀을 모아 초조대장경을 파기 시작한 지 꼭 천년이 되는 해가 아닌가,
-들머리에 중에서 변택주
법정 스님과 인연이 된 이들에게 생전 스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인연 있었던 분 19명을 저자가 만나 인터뷰한 내용들이다.
스님 성정을 옅볼수 있는데, 동시대를 살았던 것 만으로도 감사한,
언행일치의 날선 삶의 자세이셨던 지성, 그 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2012년 1월 5일에 초판된 신간이다.
오래전 열독하던 '텅빈충만'이 눈에 띈다.
'불타 석가모니'는 나온지 30년도 넘은 책인데,
상 하 두 권이었는데 한 권은 보이지 않는다.
들춰보니 초판본인데 표지가 이랬던건지 색이 바랜 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스님! 들어갑니다."
"나 죽으면 거창한 다비식이나 화장 의식을 치르지 마라.
입던 승복 그대로 입혀서 즐겨 눕던 대나무 침상에 뉘여 그대로 화장하라.
사리 따위를 수습하려 들지 마라. 부처님 진신 사리는 어디 있는가?
진짜 법신 사리는 부처님 가르침 바로 그것이다."
스님은 평소 말씀 그대로 '비구 법정'위패 하나 앞세우고 불에 드셨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중에서 장익 주교
스님 다비식에서 화장을 집행하던 상좌스님이었던가 누군가가
"스님 들어갑니다."라고 아뢰고 다비가 진행되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글을 읽다보니 유언도 떠오른다.
"사람들이 흔히,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그래, 절에 다니는 사람이 왜 그래 하는데,
다 조금씩 모자라기 때문에 교회나 절을 찾는 게 아닙니까.
천사는 교회 들어올 자격이 없어요."
느닷없는 말씀에 얼마전 불국사 취재 갔을 때 선원에 붙어 있는
오도자불입(깨친자는 들어오지 말라!)는 현판 앞에서 발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불국사를 중창한 월산 스님께서 쓰신 글이다
무슨 말씀인가?
공부 목적은 쓰기 위함이니, 도를 닦는답시고 학생에 안주하지 말고
하루빨리 공부 마치고 나가 세상을 위해 일을 하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 무엇이 옳은 삶인지 배웠으면 밥값이나 해야 한다는
준엄한 한마디를 나그네 정수리를 향해 내려친 것.
-천사는 교회 들어올 자격이 없어요 중에서 - 장익 주교
책벌레 몇마리쯤 살고 있을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보일까.
코를 대어보니 나무 타는 냄새가 난다.
돌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게 이집트예요,
그리스는 너무 깍아 가지고 생명이 약해졌어요.
설명하면 약해지잖아.
우리나라 불상이 좋은 건 근육, 힘줄 이런 게 없어서예요.
그런 게 있으면 눈길이 그리 가고 정신이 팔려서 불상이 주는 숭고함이랄까.
철학이고 뭐고가 안돼요.
내가 처음 그리스 조각을 보면서 '하, 이 사람 힘들겠다.'싶었어요.
날마다 눈을 부릅뜨고 있잖아요.
저기 내 작품. 저 안엔 뜨고 감은 게 다 있어요.
저걸 감았다고 볼 수도 떴다고 볼 수도 없어요. 부처님 눈 같이 그냥 있는 것이지,
감았다 떴다를 못하면 살아 있는게 아니거든요.
지금 내가 반가사유상 눈을 떠올리지 못해요.
전체가 보이기 때문에 눈에 눈길이 가지 않는 거죠."
-나는 이 길로 간다- 최종태
"스님과 내가 뜻이 맞아 길상사 절 마당에 관음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억겁시간 속에서 우리 두 손이 잠깐 하나로 만나서 한 형상이 태어났습니다.
이 일이 비록 작은 일이긴 하지만 결코 작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내 모든 생각과 바람을 이 형태에 다 부어 넣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는 이 형태가 말할 것입니다.
지난 날 우리 위대한 불상예술이 다시 새롭게 꽃피는 시절이 오길 바랍니다"
-화관, 정병, 구고! - 최종태
스님 열반 후 길상사 도량에 관음상에 관한 기사를 본 적 있다.
그 상을 만든분이 카톨릭 신자였다던 기억과
신문에 난 관음상 사진이 퍽 인상적이었던 성모상같기도 한 기억이 있다.
작년 봄, 문학기행을 계획하면서 실상사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도
그 관음상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던 듯 하다.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영한(자야)이 법정스님을 설득하느라 10년 걸린 얘기.
그리고 길상사를 주신분의 뜻에 맞는 도량을 만드느라 애쓴 생전 모습까지.
이 시대 역사의 현장이라고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통영으로 가고 싶어한 일행들이 많아서 못가봤지만
언제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다.
그 관음상을 만든 분이 최종태 조각가 라는 것을 이책을 읽으면서 알게되었다.
법정 스님이 해인사 강주로 계실 때,
성철 스님이 해인사 방장이 되고 나서 삼천배를 시켰다.
한여름, 대학생 몇 백 명이 법당에서 절을 하느라 흘린 땀으로 남녀 학생들 옷이
몸에 달라붙어 보기 민망스러웠다.
법정 스님은 예배란 간절함이 우러나와 공손하고 진중해야하는데
가쁜 숨을 볼아쉬면서 숫자 채우기에 급급한다고 비판하며,
진정한 참회와 예배가 지닌 뜻을 돼새기는 글을 "굴신운동"이란 제목으로
1968년 불교신문에 실었다.
성철스님이 그 글을 보셨는지 못 보셨는지 내색도 없으셨고, 주지 스님도 별말씀 없었는데,
혈기 넘치는 젊은 스님들이 법정 스님이 바깥 나들이 가신 뒤
스님 방에 있던 물건을 치워 버렸다.
두말없이 해인사를 떠난 법정스님. 뒷날 봉은사에서 성철 스님 상좌 원정 스님을 만나
흔연히 대해 주며, 잘못도 감싸 주었다.
성철 스님 역시 법정스님을 "법정은 펜대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했다.
-펜대를 꼿꼿이 세우는 사람 중에서 원택 스님
'굴신운동'
바른생각 바른 말이
조직의 권위와 전통에 위배되는 부정이 되는 경우,
대체로 사람들은 침묵한다. 개인적 인지상정이야 가능하지만,
조직의 입장이면 이해 불가다.
스님이 해인사를 떠나고, 송광사 불일암으로 나서면서
홀로살기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뜻이 모이면 힘이 되고 곧 그건 조직의 힘이 된다.
그 힘은 안과 밖을 경계짓는 단초가 된다.
'조직의 불합리' 적어도 종교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일 일 터지만 ,,
자유로울려면 홀로 일수 밖에 없음을.
하지만 홀로 있으되 멀리 갔으되 글로
성역없이 독자들을 찾아가셨으니, 이 시대 진정한 포교를 실천한 분이 아닐까 싶다.
.그런 분이 과연 이시대 몇분이라도 계시기나 한지.
법공양에 대한 성철스님과의 일화도 재밌다.
성철스님 책 출판에 앞서 윤문을 끝낸뒤
"책은 정가를 붙여 서점에 내놔야 다른 스님들도 그 뒤를 따른다.
그러니까 안된다고 역정 내시더라도 불교계 앞날을 위해
원택스님이 꼭 성취해야 한다고 당부를 하셔서 성철스님께 고하니,
아니나 다를까 성철 스님,
"책을 돈 받고 팔아? 책은 법공양이야, 이놈아 ! 우리 절집 전통을 무시해?
책은 내 돈으로 찍어 가지고 나눠주는 거야.
이놈아! 그런데 내 책에다가 정가를 붙여? 나쁜놈"고 퍼부었다고 한다.
"법공양은 그때 반짝하고 사라질 뿐이지만 가격을 붙인 책이 잘 나가면,
영원이 물이 솟는 샘물처럼 된답니다"라고
법정스님의 정견을 말씀 드렸고 처음엔 "시끄러워 이놈아!" 하시더니,
해거름에 "법정이 진짜 그러더냐?"하고 물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선문정로>와 <본지풍광>이 세상 빛을 보게 되고 책 두권을 갖다 드리니
"오자 없제" 그러셔서, 법정 스님이 수도 없이 보시고 저도 여러 번 봤는데 없다고 했죠.
두 시간도 못 돼 찾으셔서 문을 여니까 책 두 권이 날아왔고
페이지마다 뻘겋게 표시해 놓으셨더라고
다급해 법정 스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스님 대답이 걸작이었다고
"그러니까 '살 활' 자, 활자活字가 아니냐, 내 책도 적어도 3쇄는 내야
오자를 다 잡는다"면서 한가하게 웃었다고..
처음에 초판을 만권 찍자고 했더니 법정스님께서 오자가 나오니까
2천 권만 찍자고 하셨다고 2천 권이니까 망정이지...
법정스님은, 정진하고 있는데 불쑥불쑥 "스님 계십니까!"하고
사람들이 들이닥치며 소리를 질러 대는 통에 참기 힘들다고 말씀하셨다.
진명스님은 말씀 끝나기가 무섭게
"스님! 그게 싫으면 글 쓰지 마세요. 글을 쓴다는 건 사람을 부르는 일입니다.
그 사람들도 많은 고민 끝에 어렵사리 찾아오는 건데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 취급을 하시면 어떻게 해요?
저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하고 퇴박을 놨다.
법정 스님은 "그래. 진명이 말이 맞다."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셨다는데.
-땡초의 순전 -진명
80년대 초반 불교청년회 지인 서너명과 불일암을 찾은 적이 있다.
'스님 초청법회'를 대구에서 해보겠다는 기획을 했고 법문을 청하러 가는 자리였다.
그때 나는 갓 스물을 넘긴 때였고 무소유만 읽어본 시점이었다.
미리 연락을 드리고 갔지만 우리가 도착했을때 스님은 송광사에 가 계셨고,
상좌분인가 한분이 계셔서 불임암 주변을 둘러보면서 기다렸다.
잠시 후 스님이 멀찍히서 올라오셨고 합장하는 우리 일행에게
"멀리서 왔으니 울력이나 해주고 가"라며 불일암 뒤편 채마밭으로 안내 함께 잡초제거를 했다.
책에서만 뵌 어른을 직접 뵌 것도 그렇고 나는 말한마디도 못 붙이고 쳐다만 보는 지경이엇는데,
일행이 법문요청을 했고 기꺼이 승낙해 주셨다.
그때 대구에서 송광사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가 많아서 대여섯 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그리고 달 포 쯤 뒤 '스님 초청법회'에서 뵌 것까지 친견은 딱 두번이었다
법회날 대웅전엔 수많은 인파들로 그야말로 법석이었다.
이후 쭈욱 책을 통해서 스님을 뵈었다.
"어지간하면 길상사를 빨리 떠나려고 하셨어요.
빠를 때는 점심 공양 끝나고 바로 가시기도 하고,
언젠가 사월초파일 길상음악회를 하던 날, 늦게 끝났어요.
그 바람에 밤 열한 시 넘어서 가셨어요.
그런 날은 주무시고 가실 만도 하련만 그냥 가시더라고요."
--처음에는 길상사를 빨리 떠나시려고 하는 까닭을 그저 긊한 성정 때문이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작 까닭을 알고 보니 깊은 생각 끝에 나온 결단이었다.
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니 이해가 가더군요.
"한 절에는 주지가 둘이 있으면 안 돼요. 아니 할말로 나 보러 오지, 주지 보러 오겟어요."
그러시면서 그러면 주지가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고,
당신이 있으면 질서가 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마음은 닦는 게 아니라 쓰는 것이라던 당신 말씀처럼 마음 씀이 남다르셨다.
결국 법정 스님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어쩔 수 없이 길상사에서 하루 묵으셨다.
-길상사에서 딱 하루 묶으셨다- 중에서 홍기은 서예가.
"스님은 말씀도 참 쉽게 하시잖아요.
아름다운 우리말 표현,
우리 집식구는 '텅 빈 충만' 이 말에 반했대요.
어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느냐, 너무 말이 멋지다 이거야
텅 빝 건데 '충만'이라니.
그래서 내가 '이 사람아 그게 공空이다 공! 이라고 했어요
참 대단하시지 않아요?
스님이 한글을 아름답게 빛내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셨어요.
세종대왕께서도 반가우셨을 거야."
"만남은 눈뜸이다."
"친구는 내 부름에 대한 응답"
"맑음은 개인 청정, 향기로움은 그 청정이 사회에 퍼지는 메아리"
스님이 표현한 주옥같은 표현들은 셀 수 없다.
-그리워서 그립니다 -홍기은 서예가
책 꽂아두려다 눈에 띈 '텅빈충만'이다.
읽고 또 읽어서 표지가 헤져 있다.
초판(1989년)인걸 보니 그 시절엔 신간 나오면 재깍재깍 사봤던 것 같다.
'무소유'는 수도 없이 샀는데 좋은 사람들 만나면 습관처럼 선물한 기억뿐이다.
찾아보니 지금 책꽃이엔 한 권도 없다.
'서 있는 사람들' 말과 침묵' 같은 책들도 누굴 준건지 보이지 않는다.
책을 통한 만남이 워낙 좋아서
스님을 직접 만났을때의 감흥은 되려 덜했달까..
아니 말이라는 것이 굳이 말하지 않음이 나은 듯 했던,,,
글을 통한 '눈뜸' 먼저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글의 힘, 만나지 않아도 만난것 같앗떤,, 아니 그보다 더 나으니.
스님은 독자들에게 만남 이상의 '눈뜸'을 주신 분 아닐까.
그 맑고(개인 청정) 향기로움(사회 청정)의 기운,
책속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 향기 가실길이 없어라..
스님이 남긴 유언글 있어 올려본다.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어리석은 탓으로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 겠다. 번거롭고 부질없고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라.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느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갈 것이다. 내 이름으로 출판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며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려 탑도 세우지 마라"
시인 류시화에 의하면,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 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미리쓰는 유서'라는 글도 있어서 함께 올려 본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
이 세상에 올 때에도 혼자서 왔고 갈 때에도 나 혼자서 갈 수밖에 없다.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삶의 지평을 걸어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의지해서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라빛 노을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의 음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인간의 선의지, 이것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져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하여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회의 눈이 멀어버리고 작을 때만 기억에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와 말을 더듬는 장애자였다.
대여섯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었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강한 엿장수였다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에 지워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 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이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 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 우파니 샤드> 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 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음으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본래 무일푼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관념이니까.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밭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 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 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간단 명료한 것을 즐기는 성미이니까.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거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부터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은 곳이라면
아무 데서나 다비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꼭 한군데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의자의 위치만 옮겨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중 같은 것도 별로 없을 것이므로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 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사문이 되어 금생에 못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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