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누군가에게 처음 사랑을 느낄 때 혹은 어떤 연민이 생길 때 그에 딱 맞는 말은 세상에 없다. 빛의 눈부신 파동 같은 것, 저무는 호수의 묽기슭 같은 애잔함이 있을 뿐 이미 오염된 세계의 말로 그 신성한 감정은 붙잡히지 않는다. 사랑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그래서 사라에 대한 왈가.. 시와 수필 2017.03.22
그랬다지요 길 / 구름나그네 아침을 달렸다 네게로 가는 길이 아니었는데 너는 따라 왔다 저는 붉지도 않은 해가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제한속도를 모르진 않았지만 제한할 수 없는 속도로 달리기도 했다 반 바퀴를 돌거나 한 바퀴는 모자라는 유턴이 아닌 길도 있었다 그래야 그곳에 갈 수 .. 시와 수필 2017.03.19
옆모습 나무는 나무하고 서로 마주보지 않으며 등 돌리고 밤새 우는 법도 없다 나무는 사랑하면 그냥, 옆모습만 보여준다 옆모습이란 말, 얼마나 좋아 옆모습, 옆모습, 자꾸 말하다 보면 옆구리가 시큰거리잖아 앞모습과 뒷모습이 그렇게 반반씩 들어앉아있는 거 당신하고 나하고는 옆모습을 단.. 시와 수필 2017.03.18
정동진 역 해안선을 잡아 넣고 끓이는 라면집은 없었지만 파도를 의자에 앉혀놓고~ 해와 달을 불러놓고~ 정동진 역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 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 시와 수필 2017.03.17
봄의 금기 사항 봄에는 사랑을 고백하지 마라 그저 마음 깊은 사람과 나란히 봄들을 바라보아라 멀리는 산 벚꽃들 은근히 꿈꾸듯 졸음에서 깨어나고 들녘마다 풀꽃들 소근소근 속삭이며 피어나며 하늘 땅 햇살 바람이 서로서로 손잡고 도는 봄들에 두 발 내리면 어느새 사랑은 고백하지 않아도 꽃 향에 .. 시와 수필 2017.03.17
꽃 꽃 1 다시 한 번만 사랑하고 다시 한 번만 죄를 짓고 다시 한 번만 용서를 받자 그래서 봄이다 봄 2 예쁘다는 말을 가볍게 삼켰다 안쓰럽다는 말을 꿀꺽 삼켰다 사랑한다는 말을 어렵게 삼켰다 섭섭하다. 안타깝다 답답하다는 말을 또 여러 번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서 그는 스스로 꽃.. 시와 수필 2017.03.11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같이는 그걸 내 마음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틀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 시와 수필 2017.03.09
엄숙한 시간 세상 어디선가 지금 울고 있는 사람, 까닭없이 울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우는 것이다. 세상 어디선가 지금 웃고 있는 사람, 까닭 없이 웃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비웃는 것이다 세상 어디선가 지금 걷고 있는 사람 덧없이 헤매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찾아 오는 것이다 세살 어디서 누군가.. 시와 수필 2017.03.03
오리 한줄 * 문성생태공원 야경 이젠 밤바람에도 봄이 묻어온다 저수지 보러 간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 저 줄의 말단(末端)이라도 좋는 것이다 꽁무니에 바짝 붙어 가고 싶은 것이다 한 줄이 된다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 그저 뒤따라 가면 된다 뒤뚱뒤뚱하.. 시와 수필 2017.02.18
어부(漁夫)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 - 김종삼(1921~84) 출렁거리지 않는 삶은 없.. 시와 수필 2017.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