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더캄머* 과거는 왜 항상 부끄러운가? 미래는 왜 항상 불투명한가? 방문을 열면 얼굴이 화끈 뱃속이 발끈 허기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너를, 너희들을 소환한다 오늘 누구나 소유할 수 있지만, 아무나 소유하지는 않는 새로운 친구가 왔단다 너희들은 서로 인사를 하지 않는다 지분을 배정받.. 시와 수필 2016.10.10
연두 감잎이 짙어지기 전 감잎은 감잎의 마음이 있다 혓바늘 같은 소년의 연애편지 같은 감잎이 짙어지기 전 사랑해요 보고 싶어요 같은, 입맞춤! 짙어져 말문이 막히면 감잎은 지금 말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말들 원추리 꽃을 내가 말할 때 나에게 훨씬 많은 원추리 꽃이 있는 것과 같.. 시와 수필 2016.10.05
마그나 카르타 - 선언하면서 동시에 절규할 수 있다면 아침부터 썩어 있을 권리가 있고 하루를 구토로 시작할 권리가 있소 매사에 무능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알아듣는 것을 나만 못 알아들을 권리가 있소 껌껌한 콘크리트 방주를 타고 밤마다 대홍수의 꿈을 꿀 권리가 있소 머리 위로 똥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꿈을 밤마다 꿀 권리가 있소 .. 시와 수필 2016.09.08
중년 거울을 보는데 내 얼굴에서 아버지가 보였다 중년이라고 중얼거려보았다 어제는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어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옛 친구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친구의 아버지, 어머니 들이 고스란히 불려나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내는 내가 아닌, 아버지를 부축했다 잠결엔 아버.. 시와 수필 2016.09.05
꽃과 함께 식사 며칠 전 물가를 지나다가 좀 이르게 핀 쑥부쟁이 한 가지 죄스럽게 꺽어왔다 그 여자를 꺽은 손길처럼 외로움 때문에 내 손이 또 죄를 졌다 홀로 사는 식탁에 꽂아 놓고 날마다 꽃과 함께 식사를 한다 안 피었던 꽃이 조금씩 피어나며 유리컵 속 물이 줄어드는 꽃들의 식사는 투명하다 둥.. 시와 수필 2016.08.29
당신이라는 모든 매미 새벽 서너시까지 울어대는 매미 삼베 이불이 헐렁해지도록 긁어대는 소리 어쩌라고 우리 어쩌라고 과유불급 나도 그렇게 집착한 적 있다 노래라고 보낸 게 울음이라 되돌아왔을 때 비참의 소리는 밤이 없었을 것이다 불협도 화음이라지만 의미를 거두면 그저 소음인 것을 이기적인 생은.. 시와 수필 2016.08.09
사랑의 형식8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당신 너머에서 와요 내가 사랑하는 국화가 국화 너머에서 오듯이 꽃이 아니라 나비를 초대하기 위해 내가 심은 꽃나무가 꽃나무 너머에서 오듯이 - 이안(1967~ ) 미국 작가 수전 손태그(Susan Sontag)는 데카르트를 패러디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그는 존재한다”고 했.. 시와 수필 2016.07.18
함부로 애틋하게 나는 네가 비싸도 좋으니 거짓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싸구려라도 좋으니 가짜가 아니기를 바란다 만약 값비싼 거짓이거나 휘황찬란한 가짜라면 나는 네가 나를 끝까지 속일 수 있기를 바란다 내 기꺼이 환하게 속아 넘어가 주마 함부로 애틋한 듯 속아 넘어가 주마 -정유희- * 오.. 시와 수필 2016.07.06
첫사랑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봄날 저녁이었다 그녀의 집 대문 앞에 빈 스티로폼 박스가 바람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밤새 그리 뒹굴 것 같아 커다란 돌멩이 하나 주워와 그 안에 넣어 주었다- 고영민(1968~ ) 전혀 이질적인 것을 연결해 ‘새로운 전체’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을 엘리엇(TS Eliot).. 시와 수필 2016.07.04
소네트 116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혼을 방해하지 말지니. 변할 거리가 생겼을 때 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지, 혹은 핑계가 있을 때 사라지는 것도 사랑이 아니지. 오, 아니야, 사랑은 영원히 고정된 표식이야, 폭풍우를 쳐다보면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그 높이는 알되 그 진가를 아무도 모르.. 시와 수필 2016.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