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은 파도의 기억에 잠겨 나는 조용히 편지를 씁니다 검은 스웨터를 뚫고 수박 냄새가 만개한다고 씁니다 사실 이 나이의 여자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선 죄를 짓는 일과 같습니다 수박에게나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세상의 저속을 생각해봅니다 눈을 감으면 눈 속의 눈을 감으면 .. 시와 수필 2017.04.20
청파동을 기억하는 가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 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 시와 수필 2017.04.14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가령 손녀가 할아버지 등을 긁어 준다든지 갓난애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빤다든지 할머니가 손자 엉덩이를 툭툭 친다든지 지어미가 지아비의 발을 씻어 준다든지 사랑하는 연인끼리 입맞춤을 한다든지 이쪽 사람과 위쪽 사람이 악수를 오래도록 .. 시와 수필 2017.04.10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 시와 수필 2017.04.09
단추를 채우면서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시와 수필 2017.04.02
물음 세 번이나 이혼한 마거릿 미드에게 기자들이 왜 또 이혼했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녀가 되물었다 당신들은 그것만 기억하나 내가 세 번이나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은 묻지 않고 시 쓰는 어려움을 말한 루이스에게 독자들이 왜 하필 시를 쓰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가 되물었다 왜 당신들은 그.. 시와 수필 2017.04.01
천국의 눈물 천국에서 우리가 만나면 이 아빠의 이름을 기억할까 천국에서 우리가 만나면 너는 변함없이 그 모습일까. 나는 꿋꿋하게 살아내야 해 아직 너처럼 천국사람이 아니니까 천국에서 우리가 만나면 내 손을 좀 잡아 주겠니 천국에서 우리가 만나면 내가 일어서도록 좀 도와주겠니 나는 밤낮.. 시와 수필 2017.03.28
직전의 힘을 믿겠다 나는 직전의 힘을 믿겠다 나는, 벼랑끝을 뛰어 내리는 한 줄기 폭포가 되었건 탁트인 풀밭이 되었건 제 어미의 자궁 열고 지상에 마악 떨어진 한 마리 강아지 새끼가 되었건 알몸을 섞는 알몸이 되었건 직전의 힘을 믿겠다 나는, 화르르 날아오르는 천 마리 새떼가 되었건 솟아오르는 초록 풀.. 시와 수필 2017.03.26
꽃은 언제 피는가 / 김종해 사랑하는 이의 무늬와 꿈이 물방을 속에 갇혀 있다가 이승의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 그 천기의 순간, 이순의 나이에 비로소 꽃피는 순간을 목도하였다 판독하지 못한 담론과 사람들 틈세에 끼어 있는, 하늘이 조금 열린 새벽 3시와 4시 사이 무심코 하늘이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김종해(19.. 시와 수필 2017.03.24
꽃나무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으로생각하는것처럼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그러는것처럼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시와 수필 2017.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