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시의 첫 구절에 무엇이 들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무심코 지나가는 말이거나 심심풀이로 해본 말, 우리가 말하기 전에 말은 제 빛깔과 소리를 지니고 있어싿. 시의 둘째 구절은 무염수태 교미도 없이 첫 구절에서 나왔지만 빛깔과 소리는 전혀 다른 것. 시의 셋째 구절은 근친상간. 첫 .. 시와 수필 2012.10.19
나는 나쁜 시인 꾀 / 오탁번 우리는 너무 빨리 사랑을 하고 너무 빨리 이별을 하네 논꼬 보러가는 늙은 농부처럼 미꾸리 잡아먹던 두루미가 문득 심심해져서 뉘엿뉘엿 날아가는 것처럼 사랑하고 이별할 수 있다면! 솔개가 병아리 채가는 것처럼 쏜살같이 빠르게는 말고 능구렁이가 호박넌출 속으로 숨듯.. 시와 수필 2012.10.17
나비도 무겁다 /박지웅 가구들이 트럭에 올라앉아 몸을 맞춘다 여기저기 끼어드는 불편들이 불편하다 거울은 담에 비스듬히 기대여 처음으로 제 살던 집을 보고 있다 집도 거울을 보고 있다 난생처럼 보는 몰골이 뒤숭숭하다 여자는 거울 속으로 들어가서 부지런히 무언가를 안고 나온다 아이가 거울에서 지구.. 시와 수필 2012.10.11
시에 대한 각서 당신은 명절 다음 날의 적요한 햇빛, 부서진 연탄재와 삭은 탱자나무 가시, 당신은 녹슬어 헛도는 나사못, 거미줄에 남은 줄무뉘 나방의 날개, 아파트 담장 아래 서서히 바람 빠지는 테니스공, 당신은 넓이와 깊이, 크기와 무게가 없지만 그것들 바로 곁에, 바로 뒤에 있다 신문지 위에 한 .. 시와 수필 2012.10.05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 선가.. 시와 수필 2012.10.03
남편 & 오십 세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 시와 수필 2012.09.26
봄밤 2012 미당 문학상 수상은 시인 권혁욱에게 또 다른 출발선이다. 그는 "시를 쓸 때 자극을 주는 것은 추억인 듯하다"고 말했다.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취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시와 수필 2012.09.20
''나'라는 말 /심보선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 시와 수필 2012.09.19
달밤 똑 똑 똑 문 좀 열어주세요 누군가요? 나뭇잎이에요 딸깍딸깍 똑 똑 똑 문 좀 열어주세요 누구예요? 바람이에요 딸깍딸깍 똑 똑 똑 문 좀 열어주세요 누구세요? 달그림자예요 딸깍딸깍 -기타하라 하쿠슈 (1885~1942) 윤석중 옮김 누군가에게 문을 열어준 것이 언제인가? 외롭다면, 괜히 그냥 .. 시와 수필 2012.09.18
습관들 습관들/ 천서봉 1 모래를 씹으며 당신을 생각한다 잠깐이지만 아직도 이 별에는 꽃들이 지고 핀다 어느 순간에는 귀가 커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불행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내게로 불려와 무릎을 꿇는 밤에는 순리처럼 무책임한 단어가 없다 모를 일이지만 그건 꽃들 스스로도 고백.. 시와 수필 201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