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화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 옅은 안개 속에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다. 저수지 돌며 연필화 흔적처럼 흐릿해지는 길 입구에서 바위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다. 뵈지는 않지만 길 속에 그대 체온 남아 있다. 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무언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눈송이와 부딪쳐도 .. 시와 수필 2011.02.26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나 홀로 걷는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지기 전에 그대가 와서 반짝이는 이슬을 텁니다 나는 캄캄하게 젖고 내 옷깃은 자꾸 젖어 그대를 돌아봅니다 어린 참나무 잎이 마르기 전에도 숲에는 새들이 날고 바람이 일어 그대를 향해 감추어두었던 길 하나를 그.. 시와 수필 2011.02.25
서해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 시와 수필 2011.02.24
움직이는 근심은 가볍다 움직이는 근심은 가볍다 기차는 떠나서 기차는 달린다 움직이는 건 가볍고 움직이는 근심은 가볍다 달리는 기차 바퀴 소리의 그 꿈결이 이 기나긴 쇳덩어리를 가볍게 띄운다 - 꿈결 부상(浮上) 열차. 교행(交行) 때문에 서 있으면 근심도 서서 고이고 꿈꾸는 간이역도 보이지 않는다 기차는 움직인다 .. 시와 수필 2011.02.22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 시와 수필 2011.02.20
초봄 오시네 오시고 계실까 잠드셨을까 오신다는 소식은 접했으나 아직 깜깜 무소식, 저 산 너머 남쪽 나라 땅속에서 파릇파릇 얼굴 내밀고 두리번거리실까 봄이여! 희망이여! 님 오시는 길 행여 거칠까 봐 구름이 마중 나가 안개로 물 뿌리시고 미끄러운 길 녹이나니, 산수유 진달래 앞장 세워 사뿐사뿐 꽃신 신고.. 시와 수필 2011.02.19
나쁜 지지배들 어제 안도현을 배울 때도 그러더니 오늘도 역시나다 교과서를 여니 짠, 하고 나오는 시가 도종환 시인의 '어떤 마을' 반가운 마음에 소개가 길었나 보다 이들 시인이야 나도 조금은 알고 여차여차 술 한잔한 적도 있다니까 워어, 워어, 중 일짜리 가시나들 솟아오른다 그쯤으로 끝냈어야 했다. 원한다.. 시와 수필 2011.02.18
세가지 방문 신체의 어느 일부분이 그 사람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 되는 경우가 있다. 유달리 촐싹대고, 껄끄러운 말도 악의 없이 잘하는 사람에게 '입방정을 떤다'고 말하기도 하고, 여성스럽고 고생하지 않고 살았을 것 같다는 말은 '손이 참 곱다'고 설명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발이 참 빠르다'는 말은 성격.. 시와 수필 2011.02.14
구름뜰 이야기 옛 날 옛 날 한 옛 날에 하얀 구름 다스리는 백운산 신령님에 막내둥이 개구쟁이 운평 도령이 옛 날 옛 날 한 옛날 그 어느 날에 풀 내음 좋아라 반딧불이 앞장세워 구름으로 썰매타고 웃담 지나 아랫 담 예 예 까지 왔다 그만 작은 이실 큰 애기씨 큰 이실 작은 악시 호호 재잘 빨래터 용소 날망 낭구 그.. 시와 수필 2011.02.12
취하라 항상 취하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그대의 허리를 휘게 하는 무서운 시간의 중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끊임없이 취하라. 그러나 무엇에? 술이건, 시이건, 선이건, 그대가 좋아하는 것에. 다만 취하라. 그러다 때로 궁전의 계단.. 시와 수필 2011.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