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연못 얼음 위에 누가 저렇게 돌을 던졌을까 구멍 난 가슴을 덮으려 연못은 더 많은 바람과 그늘을 불러 모았겠다 나이테처럼 얼음을 덧입고 얼음의 근육들이 자란다 더러 뚫고 지나가지 못한 돌들이 얼음에 박혀 있다 거미줄 같은 균열들이 돌을 붙들고 있다 뿌리처럼 퍼져 나가 스크.. 시와 수필 2020.02.04
어느 날, 우리를 울게 할 노인정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 뒤에서 보면 다 내 엄마 같다 무심한 곳에서 무심하게 놀다 무심하게 돌아갈, 어깨가 동그럼하고 낮게 내려앉은 등이 비슷하다 같이 모이니 생각이 같고 생각이 같으니 모습도 닮는 걸까 좋은 것도 으응 싫은 것도 으응 힘주는 일 없으니 힘드는 일도.. 시와 수필 2019.12.23
믿음과 기분 믿음을 가지면 리듬을 가질 수 있다 조그만 세계에 후두두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 조율할 수 있다 크고 나쁜 소식이 작고 좋은 소식과 섞일 수 있도록 달린다 잽싸게 혹은 느리게 정곡을 찌르는 속력으로 바다에 가까이 산다는 것은 바다에 가까이 산다는 기분과 사는 것 이따금 바.. 시와 수필 2019.12.14
동그라미가 되고 싶었던 세모 옛날 옛적에 세모와 동그라미가 살았습니다. 둘은 언덕에서 구르는 시합을 자주 했는데 동그라미가 세모보다 늘 빨리 내려갔습니다. 세모는 동그라미가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달라지기로 했습니다. 동그라미를 이기기 위해 언덕에서 구르고 또 굴렀습니다. 어느새 세모의 모서리는 둥글.. 시와 수필 2019.11.05
가을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 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 마을은 성긋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言約도 .. 시와 수필 2019.11.01
시, 부질없는 시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써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 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한다면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 시와 수필 2019.10.22
탱자나무와 굴뚝새 탱자나무 울타리에는 굴뚝새가 산다. 귀신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시와 가시가 촘촘히 얽힌 그물망을 용케도 잘 비집고 다니며 보금자릴 튼다. 가장 불안하고 위험한곳이 가장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평화로운 안식처라는 것을 고 작은 새는 이미 오래전에 터득했으리라 아.. 시와 수필 2019.10.14
달이 자꾸 따라와요 어린 자식 앞세우고 아버지 제사 보러 가는 길 ㅡ 아버지 달이 자꾸 따라와요 ㅡ 내버려 둬라 달이 심심한 모양이다 우리 부자가 천방둑 은사시나무 이파리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솨르르 솨르르 몸 씻어내는 소리 밟으며 쇠똥냄새 구수한 판길이 아저씨네 마당을 지나 옛 이발소집.. 시와 수필 2019.09.13
종례시간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지 말고 코스모스 갸웃갸웃 얼굴 내밀며 손 흔들거든 너희도 코스모스에게 손 흔들어 주며 가거라 쉴 곳 만들어 주는 나무들 한 번씩 안아주고 가거라 머리털 하얗게 셀 때까지 아무도 벗해 주지 않던 강아지풀 말동무 해주다 가거라 얘들아 곧장 집으로 가 .. 시와 수필 2019.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