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다 안다는 것은 아픈 일이다 오며 가며 낯이 익은 노점상 부부가 있다. 연 3일 내리는 봄비에 괜한 걱정이 앞선다. 개업 몇 달 만에 문을 닫고 만 단골 싸릿골 영양탕은 또 어디에다 자리를 펼쳤는지 , 철든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무서운 일이다. 꺽일대로 꺽였을 때 비로소 철이 든다고 한.. 시와 수필 2013.04.19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외 2편/서정홍 내가 가장 착해질 때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말하지 않아도 이십오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내는 땅콩을 삶아서 못나고 쭈그러진 것을 먼저 골라 먹는다 손에 잡히는 대로 먹으면 되지 꼭 못나고 쭈그러진 것을 먼저 골라먹어야 하냐고 물으면 씩 웃.. 시와 수필 2013.04.17
'사이' 혹은 '경계'의 시학 배추나 무 같은 채소는 뿌리와 잎의 경계 지점에 가장 영양소가 많다. 과일 역시 껍질 바로 안쪽, 과육과 껍질이 맞물린 지점에 비타민이 몰려 있다고 한다. 껍질째 먹으라는 말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사물의 핵심적인 부분은 그 사물의 두 성분이 만나는 지점, 그 '사이'에 존재하는.. 시와 수필 2013.04.15
교대역에서 3호선 교대역에서 2호선 전철로 갈아타려면 환승객들 북적대는 지하 통행로와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오르내려야 한다 바로 그 와중에 그와 마주쳤다 반세기 만이었다 머리만 세었을 뿐 얼굴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서로 바쁜 길이라 잠깐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 시와 수필 2013.04.15
하늘 길 나무가 동쪽 하늘로 팔을 길게 뻗은 것은 그 쪽으로부터 걸어 오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 보다 그 분이 오시기 전 더 아름다운 한참의 하늘 빛 그것 때문이다 나무가 저린 몸으로 서서 서리속에 눈비 속에 팔을 높이 들고 잇는 것은 구름보자기에 감싸인 달 보다 더 잠 못 들게하는 그 위에 .. 시와 수필 2013.04.11
독서 책을 한 번 읽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두번째로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전문가들이 모두 입을 모아 그렇게 충고한다. 기억 속에서 빛이 바랬거나 처음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한 책만을 다시 읽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장, 주어, 동사, 책 속에서 운명적인 결정권을 행사하는 수식어 또.. 시와 수필 2013.03.27
좋겠다 끝가지 다 부를 수 있는 노래 몇 개쯤 있었으면 좋겠다 매일 시 한 편씩 들려주는 여자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안가는 예쁜 시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몸시 힘들 때 그저 말없이 나를 안아 재워줄 착한 아기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바람을 노래할 때 그 바람.. 시와 수필 2013.03.26
따뜻한 편지 당신이 보낸 편지는 언제나 따뜻합니다 물푸레나무가 그려진 10전짜리 우표 한 장도 붙어 있지 않고 보낸 이와 받는 이도 없는 그래서 밤새워 답장을 쓸 필요도 없는 그 편지가 날마다 내게 옵니다 겉봉을 여는 순간 잇꽃으로 물들인 지상의 시간들 우수수 쏟아집니다 그럴 때면 내게 남.. 시와 수필 2013.03.16
즐거운 장례식 생전에 준비해둔 못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혔다.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수의 위에 한 겹 더 .. 시와 수필 2013.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