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앞에 봄이 있다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 시와 수필 2013.03.05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人磬)을 머리 들이받아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 시와 수필 2013.03.01
우리가 어느 별에서 우리가 어느 별에서/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이토록 애타게 그리워 하는가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 했기에이토록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나꽃은 시들고 해마저 지는데저문 바닷가에 홀로 어두움 밝히는 그대그대와 나 그대와 나해뜨기 전에 새벽을 열지니해뜨기 전에 새벽.. 시와 수필 2013.02.21
와유(臥遊)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허면, 훗날의 그.. 시와 수필 2013.02.20
움직이는 누드 51 1 어떤 고요함은 도착 훨씬 뒤지만 또 어떤 고요함은 출발 직전이어서, 이상한 푸른빛 사이로 사뿐히 너는 발꿈치를 들어 올린다 튀어나온 젖가슴은 동요하고 있었을 거다 그러나 아직 네 팔과 다리는 네 생각을 채 짐작하지 못한 듯, 아니면 벌써 잊어버린 듯 2 네가 팔을 뻗어 남자의 .. 시와 수필 2013.02.19
원시(遠視)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 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떨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 시와 수필 2013.02.07
이토록 우울한 천강성이란 별은 길방을 비추기 위해 흉방에 위치한다는 데 새는 모습은 가리고 부지런히 노래를 보내는데 마당에 나가 그저 올해 가을은..... 이라고 중얼거리지 가을이, 죽을 것 같은 가을이 하루종일 쳐들어와 죽지 않기 위해 나는 물을 끓이지 물을 끓이지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는 .. 시와 수필 2013.02.01
그렇게 소중했던가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 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뿐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 시와 수필 2013.01.28
타이어의 못을 뽑고 사랑했었노라고 그땐 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를 너를 찾아 고백하고도 싶었다 그것은 너나 나의 가슴에서 못을 뽑아버리고자 하는 일 그러나 타이어에 박힌 못을 함부로 짭아 뽑아버리고서 알았다 빼는 그 순간 피식피식 바람이 새어나가 차는 주저않.. 시와 수필 2013.01.25
같은 과 친구들 삼총사라고 알려진 우리 네 명은 어느 날 바닷가 마을의 작은 민박집으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좁은 방 한 칸에서 말걸리를 부어 마시며, 우리는 삼총사라고 알려졌는데. 어째서 이렇게 할 얘기가 없는 것 일까? 어쩌면 이 여행은 우리 삼총사들의 이별 여행일지도 몰라. 여행을 떠나기 .. 시와 수필 2013.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