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처럼 새싹을 틔우고 잎을 펼치고 열매를 맺고 그러다가 때가 오면 훨훨 벗어버리고 빈 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 새들이 날아와 팔이나 품에 안겨도 그저 무심할 수 있고, 폭풍우가 휘몰아쳐 가지 하나쯤 꺾여도 끄떡없는 요지부동. 곁에서 꽃을 피우는 꽃나무가 있어 나.. 시와 수필 2012.03.04
막막한 날엔 왜 모르랴 그대에게 가는 길 왜 없겠는가 그대의 높이에로 깊이에로 이르는 길 오늘 아침 나팔 덩굴이 감나무를 타고 오르는 그 길 아무도 눈치재지 못할 속도로 꽃은 기어올라 기어이 울음인지 웃음인지 비밀한 소리들을 그러나 분명 꽃의 빛깔과 꽃의 고요로 쏟아놓았는데 너와 내가 .. 시와 수필 2012.02.29
나무가 말하였네 나무가 말하였네 나의 이 껍질은 빗방울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햇빛이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구름이 앉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안개의 휘젓는 팔에 어쩌다 닿기 위해서 나의 이 껍질은 당신이 기대게 하기 위해서 당신 옆 하늘의 푸르고 늘씬한 허리.. 시와 수필 2012.02.28
몽해 항로 6 - 탁란 가장 좋은 일은 아직 오지 않았을 거야. 아마 그걸 거야.아마그럴 거야. 감자의 실뿌리마다 젖꼭지만 한 알들이 매달려 옹알이를 할뿐 흙에는 풀 마른 자리뿐이니까 생후 두 달 새끼 고래는 어미 고래와 함께 찬 바다를 가르며 나가고 있으니까. 아마 그럴 거야. 물 뜨러 간 어머니 돌아오.. 시와 수필 2012.02.25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없는 바람은 창문을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 시와 수필 2012.02.23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 그리운 102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들 저것 좀 봐, 꼭 시간이 떨어지는 것 같아 기다린다 저 빗방울이 흐르고 흘러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저 우주의 끝까지 흘러가 다시 은행나무 아래의 빗방울로 돌아올 때까지 그 풍경에 나도 한 방울의 물방.. 시와 수필 2012.02.21
가구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들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어쩌다 내가 아내의 문을 열고들어가면 아내의 몸에서는 삐이걱 하는 소리가 난다. 나는 아내의 몸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무엇을 찾으려 왔는지 잊.. 시와 수필 2012.02.17
삼겹살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한시간 이 넘도록 내 몸에서 고기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다. 불에 익은 피, 연기가 된 살이 내 땀구멍마다 주름과 지문마다 가득차 있다. 배 고플 때 허겁지겁 먹었던 고소한 향은 사라지고 도살 직전의 독한 노린내만 남아 배부른 내 콧구멍을 솜뭉.. 시와 수필 2012.02.15
고독한 사냥꾼 남자국(男子國)이라는 나라에 사냥꾼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에 여자는 없고 남자만 있었다는구나. 사냥만 하고 살았는데 총소리를 허공에 묻고 마음이 올 때 그때가 사냥철이었다는구나. 사냥철이 되면 사냥꾼의 기새가 하늘까지 뻗었는데 그땐 온 마음이 텅 비었다는 구나. 그.. 시와 수필 2012.02.14
물길의 소리 그는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렇군, 물소리는 물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바위를 넘어가는 소리, 물이 바람에 항거하는 소리 물이 바삐 바삐 은빛 달을 앉히는 소리, 물이 은빛 별의 허리를 쓰다듬는 소리, 물이 소나무의 뿌리를 매만지는 소리....... 물이 .. 시와 수필 2012.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