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먹은 나뭇잎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이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느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숭숭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이쁘다 상처가 나서 이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시와 수필 2011.09.29
어머니 날 낳으시고 오줌 마려워 잠 깼는데 아버지 어머니 열심히 사랑 나누고 계신다, 나는 큰 죄 지은 것처럼 가슴이 뛰고 쿵쾅쿵쾅 피가 끓어 벽으로 돌아누워 쿨쿨 잠든 척한다, 태어나 나의 첫 거짓말은 깊이 잠든 것처럼 들숨날숨 고른 숨소리를 유지하는 것, 하지만 오 줌 마려워 빳빳해진 일곱 살 미운 내 고추 감.. 시와 수필 2011.09.28
해거리 원래 남의 밭에 있던 것을 슬쩍 해와서 화단에 심어놓은 뒤로 내 속셈 모르는 척 적작약이 다신 꽃을 피우지 않았답니다. 제까짓 놈 제까짓 놈 언제까지 영 꽃 안 피우는지 두고보자 벼른 지 몇 해 되는 사이에 그만 나는 눈길을 거두었고, 되는 일이 없었답니다. 날 사로잡아봐야 흰 꽃송이나 도둑당하.. 시와 수필 2011.09.27
쑥부쟁이 사랑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 가을 들어 쑥부쟁이 꽃과 처음 인사했을 때 드문드문 보이던 보랏빛 꽃들이 가을 내내 반가운 눈길 맞추다 보니 은현리 들길 산길에도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 꽃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름 알면 보이고 .. 시와 수필 2011.09.21
얼레지 옛 애인이 한 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이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면서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봉오리가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 시와 수필 2011.09.20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 시와 수필 2011.09.19
그대여 그대여 한세상 사는 것도 물에비친 뜬구름 같도다 가슴이 있는 자 부디 그 가슴에 빗장을 채우지 말라 살아있을 때는 모름지기 연약한 풀꽃 하나라도 못견디게 사랑하고 볼 일이다 -이외수 가슴이 있는자 모름지기 풀 꽃 하나라도 못견디게 사랑하고 볼 일이다. 시와 수필 2011.09.17
구부러진다는 것 잘 마른 핏빛 고추를 다듬는다. 햇살을 차고 오른 것 같은 물고기에게서 반나절 넘게 꼭지를 떼어내다 보니 반듯한 꼭지가 없다. 몽땅 구부러져 있다. 해바라기의 올 곧은 열정이 해바라기의 목을 휘게 한다. 그렇다. 고추도 햇살 쪽으로 몸을 디밀어 올린 것이다. 그 끝없는 깡다구가 고추를 붉게 익힌.. 시와 수필 2011.09.13
바닥론 나는 바닥이 좋다. 바닥만 보면 자꾸 드러눕고 싶어진다. 바닥난 내 정신의 단면을 들킨 것만 같아 민망하지만 바닥에 누워 책을 보고 있으면 나와 바닥이 점점 한 몸을 이루어가는 것 같다. 언젠가 침대를 등에 업고 외출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식구들은 내 게으름의 수위가 극에 달했다고 혀를 찼지.. 시와 수필 2011.09.10
세상의 나무들 세상의 나무들은 무슨 일을 하지? 그걸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 허구한 날 봐도 나날이 좋아 가슴이 고만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리는 그런 사람 땅에 뿌리내려 마지않게 하고 몸에 온몸에 수액 오르게 하고 하늘로 높은 데로 오르게 하고 둥글고 둥글어 탄력의 샘! 하늘에도 땅에도 우리들 가슴에도 들.. 시와 수필 2011.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