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3048

자기를 함부로 주지마라

자기를 함부로 주지 말아라 아무 것에게나 함부로 맡기지 말아라 술한테 주고 잡담한테 주고 놀이한테 너무 많은 자기를 주지 않았나 돌아 보아라 가장 나쁜 것은, 슬픔한테 절망한테 자기를 맡기는 일이고 더욱 좋지 않는 것은 남을 미워하는 마음에 자신을 던져 버리는 일이다 그야말로 그것은 끝장이다 그런 마음들을 거두어 들여 기쁨에게 주고 아름다움에게 주고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마음에 주라 대번에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젊어지다 못해 어려질 것이고 싱싱해 질 것이고 반짝이기 시작할 것이다 자기를 함부로 아무것에나 주지 말아라 부디 무가치 하고 무익한 것들에게 자기를 맡기지 말아라 그것은 눈 감은 일이고 악덕이며 인생한테 죄 짓는 일이다 가장 아깝고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므로 보다 많은 시간을 자기 ..

시와 수필 2022.03.19

시간이 필요해

익숙하지 않다고 불편하기만 할까 불편해도 편한 게 있다 시간에게 시간을 주자 두부가 콩에서 왔듯이 온전히 탈바꿈하기를 바라는 기대가 사람에게도 두부를 내밀 때가 있지 않은가 부드러운 것에는 자신을 견딘 시간이 있으니 기꺼이 믿자 시간을 지난겨울이 피워 올린 꽃봉오리 꽃대까지 싱그러운데 당신은 편해졌는지 나는 그 시절 겨울이었을까 꽃이었을까 22.3.12

사람향기 2022.03.11

닮은 돌!

강구항엔 지난 주말 바람이 많았다 큰아들이 점심때가 다 되어 번개를 모의했고 강구항에서 만나기로 하고 청주서 출발 연이어 구미서도 출발을 했다 일상적이지 않은 바다 그곳에 집중하는 아이들을 보는 일이란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구김살 없는 아이들의 모습은 밝은 미래를 보는 일 같다 꽃삽을 가져온 녀석 준비할 때부터 마음은 이미 바다였으리라 먹고 마시고 해산물도 보고 갈매기도 배도 맘껏 구경했다 더 놀다 가겠다기에 손 흔들어 주고 출발하려는데 "할머니, 잠깐만 잠깐만 " 푹푹 빠지는 모래길을 달려와 고사리 손에서 무얼 건네며 내 귀를 잡아당긴다. 귓속말이 주는 친밀함이란 참 든든한 빽 같다. "할머니 이거 내 고추 닮았어요! " .ㅎㅎ 나는 어찌나 고맙던지 귀한 고추를 덥석 받았다 강구 다녀온 지가 열흘쯤 지..

사람향기 2022.03.10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는 잘못 보기 위해 보는지 모른다. 잘못 말하기 위해 말하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달라지지 않는단 말인가 ㅡ이규리 중에서 '그렇지 않고서야' 이것이 나 때문인지 너 때문인지 위무나 위로가 생기를 잃은 시간 구름이 비가 되지 못하고 흐르고 있을 때 나를 품어준 건 무엇이었을까 바람이었나 사람이었나 당신은 당신으로 머물고 있었고 그제서야 나는 내가 쉬워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2.2.24 경산 커피본가..

시와 수필 2022.02.25

미안하다 말을 못해서

빗길에 착 달라붙은 나뭇잎을 보면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맞딱뜨린 느낌이 든다 꺼낼 수 없었던 어려운 말 그렇게라도 짚고 넘어가길 바란 것일 텐데 허드슨강을 툭툭 끊으며 가던 적막한 유빙들 함께 떠가던 찬 주검들 이쪽 심장이 저쪽 심장에 부딪고 있었지 그런 춥고 검은 날 조금 더 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남을 수도 떠날 수도 없어서 이리저리 병을 옮기던 폐와 심장의 기근에서 흔적은 허약한 쪽에 새긴 비명들인 것을 우리 무사할 수 있을까 잘 가라앉을 수 있을까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미안해서 다른 말을 하기도 했다 젖어 선명한 모습은 제 웃음을 저 홀로 듣는 허무나 공포였을 테니 바닥에 착 붙어서 어디 닿을 곳 다시없어서 ㅡ이규리

시와 수필 2022.02.10

저녁의 문

서풍은 서쪽으로 부는 바람 아니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 하니 그냥 다 서풍만 같다 이파리 뒤에 숨은 열매가 말라가고 있을 때 어느 쪽으로 가느냐고 너는 물었다 마른 덩굴은 끝내 팔을 풀지 않고 생을 마쳤는데 그 안은 비어 있었고 어느 쪽으로도 갈 곳이 있지 않았다 거미는 거미를 사랑하고 벌새는 벌새를 부르고 그렇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말라가던 열매가 빨갰는지 어땠는지 너는 다시 물었지만 그 말도 비어 있었다 떠나는 일이야 말로 서쪽이었는데 그토록 아프다 하면서 세계는 변하지 않는 것이지 꽉 낀 팔을 풀어주고 어느 쪽으로 가는지 어느 쪽에서 왔는지 꼭 다문 입술 어두워지는 문밖으로 다만 서풍이라 싶은 것이다 ㅡ이규리

시와 수필 2022.02.07

각축

그림 이응노 무제 어미와 새끼염소 세 마리가 장날 나 왔습니다. 따로따로 팔려갈지도 모르지요. 젖을 뗀 것 같은 어미는 말뚝에 묶여있고 새까맣게 어린 새끼들은 아직 어미 반경에서 놉니다. 2월,상사화 잎싹만한 뿔울 맞대며 툭, 탁, 골때리며 풀 리그로 끊임없이 티격태격입니다. 저러면 참, 나중에 나중에라도 서로 잘 알아볼 수 있겠네요. 지금 세밀하고도 야무진 각인 중에 있습니다. ― 문인수 시집 『쉬!』(문학동네, 2006년)에서

시와 수필 2021.12.17

이성복 시인을 만나다

느낌/이성복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서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강/이성복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서해 / 이성복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 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책향기 2021.10.16

테크네’,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기술을 통해 앞서기’(Vorsprung durch Technik). 15초 안팎의 TV 광고에 스치듯 지나가는 이 문구를 볼 때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한번쯤 그 차의 핸들을 잡아보고 싶다는 욕구가 뱃속에서 스멀거린다. 근거 없는 오만함으로 읽히는 ‘자동차 그 자체’(Das Auto)라는 문구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굳이 문명 변천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더 나은 삶을 향한 사회적·문화적·물리적 환경의 변화는 기술적 진보와 그 궤를 같이한다. 마을 이장님 댁에 기계식 전화기라도 놓여 있으면 그나마 다행, 우체국까지 수십 리 산길을 달려가 전보를 치던 것이 그리 오래전 풍경이 아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Ars longa, Vita brevis)라는 히포크라테스의 탄식(?)을 ‘예술의 영..

좋은 기사 2021.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