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향기 545

빼기

오늘 아침 양말 서랍장에서 제일 오른쪽 것을 꺼내 신고 아침을 하고 설거지를 끝냈는데 뭔지 모르게 개운한 기분. 서랍장을 여닫을 때마다 양말을 꾹 눌러주어야 닫힐 정도였는데. 어떤 사이트에서 보게 된 팁! 그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시도해 본 일이다. 기분이 개운한 건 요 서랍 때문이란 걸 눈치채는 데는 시간은 좀 걸렸다 공간에서 공기를 뺐다. 공기도 뺄 수 있고 마음도 뺄 수 있는 살이라면 오래전 하늘나라로 간 친구는 마음 빼기 명상을 내게 전해 주고 떠났는데 나는 살다가 가끔 빼기가 생각날 때면 그녀가 기억난다 그녀가 내게 준 건 마음이고 빼기라는 걸 잊을 수가 없다 유월 아침! 뻐꾸기는 어쩌자고 저리 울어대는지 내가 존경하는 지인은 젊을 때는 자신을 널리 알리고 싶었는데 지금은 자기를 기억하는 사람들..

사람향기 2021.06.10

봄비

비가 오고 있다 황사 미세먼지 꽃가루까지 더해 연일 대기가 지저분했는데 만물이 샤워하는 것 같다 나무가 물기를 머금으면 화재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일기예보를 안내하는 아나운서의 맨트가 들려온다 약속한 일도 없이 약속이 있었던 것 마냥 보내는 시간이란 제법 활기찬 일이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그게 단지 내 바람뿐이었다는 걸 실감하는 일이란 또 갑자기 엄청 무료해지는 일이다 무료함은 할 일이 없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못할 때 그곳에 가 있는 마음을 몸이 견디는 시간 같다. 비는 내리고 비를 견디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무얼 하면 좋을까 며칠 전 지인이 보내 준 고향 쪽 풍경에 머문다 저기 싱그런 풍경에도 비는 올 테고 밤새 나무들 성큼 촉촉해지리라 사람에게도 내려 물기 머금을 수 있다면 참 반가운 이..

사람향기 2021.05.04

고향의 봄 맛을 해마다 보여 주는 이가 있다 여려서 재우면 안 된다고 경비실 가보라는 전화를 귀가하는 차 안에서 하는 것도 언제나 같다 나물 봉지는 새순이 가지고 있던 온기인지 채취할 때의 태양열 때문인지 밤이 이슥한 시간인데도 한낮의 열기가 그대로다. 순이 봉지에 갇히면 열을 내는지 체온이 없다고 열기가 없는 건 아니다 정성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라 그걸 받아먹는 일이란 또 얼마나 송구스러운지 그녀의 유년기 고향이 내게로 온 것 같다 어릴 적 고향 논두렁 밭두렁을 쏘 다닌 걸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녀에게도 고향의 들판은 봄마다 도지는 지병 같기도 할 것이다 또 봄이 오기 전에 나는 무얼 해야 하나......

사람향기 2021.04.05

그리다

다섯 살 아이가 그린 애꾸눈 해적 성한 눈은 윙크하는 것 같고 입 모양은 웃고 있다 해적은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뱀을 보고 놀란 아이에게 보이는 건 무섭지 않은 거라고* 알려 주었나 우리는 눈을 감고도 서로를 볼 수 있을까 안 보는 줄 안다고 3월 새순 같다면 꽃은 피지 말아야 하리 먼저 나간 말들이 날개를 달 때 마음은 어디에 가 있었는지 못 본 눈으로 돌이킬 수 없어 질끈 기다린 걸 당신은 알고나 있었는지 내 눈을 내 안으로 돌릴 수 있다면 해적이 될 수 있을까 아이 눈은 요원하고 내 눈은 멀어 버렸네 *영화 '미나리'

사람향기 2021.03.03

세배

세배하라는 총각 삼촌에게 두 조카가 첫 세배를 한다 납작 엎드리긴 했는데 언제 일어날지 몰라 이마는 땅에 둔 채 고개 돌려 서로를 훔친다 절값 넣어 달라고 입벌리던 복주머니가 삼촌에게도 뻗쳤다 보는 대로 하는 따라쟁이들에게 보여주는 일 외에 줄 게 무애 있을까 내년은 어떤 설이 될지 모르지만 아이들의 세배는 자라 있으리라 서툴러서 예쁜 것들 소소한 순간들이 지나고 있다 행복인 줄 아는 채 모르는 채

사람향기 2021.02.18

욕망에 대하여

고독은 혼자 있는 자의 심정이 아니라 욕망하지 않는 것과의 연결을 끊은 자가 확보한 자유다.” 어제 일자(1월 13일) 중앙일보 문장으로 읽는 책 ㅡ양성희 칼럼니스트가 쓴 신작 '은둔기계'(김홍중)에 관한 글의 마지막 문장이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오타난 문장인 줄 알았다. 마지막 문장 (것과의 연결을 끊은)은 없어도 되는 비문으로 보였다. 왜 이렇게 비틀어 놓았을까! 그리고 몇 번 더 보고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끝내고 다시 되새김 한 뒤에야 해독이 가능했다. 나는 '욕망하지 않을 줄 아는 게' 고독을 선택하는 거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다. 관계에서 내 사적욕망을 제한하는 것이 고독이고 선택한 자유라고, 그래서 욕망을(원하는 것)에 제한해 두었다. 원하지 않는 것도 욕망이라고 인식했던 이라면 위..

사람향기 2021.01.14

10시의 잎이 11시의 잎에게

깜빡 눈 감을 때 연두와 눈뜰 때 연두가 같지 않고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지 않음을 어떻게 설명할까 내가 있었음과 당신의 없었음은 또 어떻게 말할까 늦은 오후에 후둑 비 떨어진다 비와 비 그 사이가 바로 연두 말하려다 만다 연두를 설명할 수 없었던 일처럼 사랑도 그러했는데 다 듣고는 믿지 않을 거면서 당신들은 말하라 말하라 다그친다 설명하라 한다 할수록 점점 다른 뜻이 되어가는 절망 배신 희생 죽음 따위와 뭐가 달라 그들 생애엔 순간을 포함하지 않았으리 비루하지도 않았으리 연두가 어떻게 제 변화를 설명할 수 있겠는지 10시의 잎이 11시의 잎에게 마음이 있어도 마음이 영 옮기지 못하는 그 결별들을 다 어떻게 ㅡ이규리 중에서

사람향기 2021.01.13

생태공원 겨울풍경

해마다 저수지 1월 풍경은 변함없다 새해 들어 연일 영하권이더니 오늘은 햇살과 바람도 순했다 구미는 거리두기 2.5단계 경계할 건 사람뿐이어서 책이나 음악이 벗이 되어가고 이 글은 쓰는 시간에도 확진자가 3명 나왔다는 문자가 왔다 불확실한 미래! 평범했던 일상이었는데 평범도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지도 1년이 넘었다 저수지 풍경은 같지만 같지만은 않다 지난여름 최선이었던 꽃대들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케도 박혀있다 멈춘 것 같지만 깨어있으리라 어딘가 저 아래쪽 봄은 올 테고 수면도 피어나리라 여축없이 순환하는 자연 부자연의 편리에 익숙해진 우리 봄이 오면 봄은 올까 2021.1.12

사람향기 2021.01.12

밤새 눈 내리고 바람 불더니

지금 구미는 영하 11도 체감온도는 영하 19도라고 뜬다 체감이 이렇게 배나 되는 건 마음 때문일까 몸 때문일까 체감은 누구한테나 같이 적용될까 지난밤 나목 사이로 불던 바람소리는 귀신 영화에 효과음으로 써도 좋을 듯 살벌했다 멀리 있는 아들 출근길도 걱정되고 가까이 있는 식구들 출근길도 걱정되고 또 체감 예민한 이들의 어깨는 얼마나 움츠러들까 그런 생각도 지나갔다 엄청 추운걸 잘 견뎌야 엄청 더운 것도 잘 견딘다는데 시간적으로는 먼 것 같아도 겨울과 여름은 연결되어 있음을.. 오늘 같은 날은 내 발걸음에만 집중 아파트 앞 도로는 안정적이고 차량 속도도 무난하다 도로 눈은 어지간히 녹은듯하다. 일상의 힘을 알고 오늘도 밀고 나갈 몸들을 응원하는 눈 온 풍경을 앞에 둔 아침..

사람향기 2021.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