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3048

콩깍지 & 콩꼬투리

콩깍지는 콩이 들어 있는 콩꼬투리에서 콩을 빼낸 빈 껍질을 말한다. 콩깍지가 씐 것은 껍데기뿐인 상태를 일컫는 말이겠다. 콩꼬투리가 씌었다면 내실이라도 있겠는데 콩깍지라고 표현한 것만 봐도 구전으로 내려오는 속담들의 깊은 뜻이란 새길만하다. 명절 지나고 지인과 공감한 얘기도 "시아버지 사랑은 며느리"라는 말과 "고부간의 갈등"에 대한 얘기였다. 며느리가 예쁜 건 맞지만 대놓고 표현하는 남편을 보는 일이란 아내 쪽에선 썩 유쾌하지 않다고. 가부장제가 심하던 고릿적엔 갓 시집온 며느리를 평생 뿌리내리고 살아온 아내보다 어여삐 여긴다면 시어미 심사가 편치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고부갈등 주범이 시아버지 일 수도 있는 것이다. 윗사람이 현명해야 그 어떤 단위 조직도 편하다. 집안이라고 식구라고 다를 ..

my 수필 2020.10.11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서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고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ㅡ정호승

시와 수필 2020.10.03

저물 듯 오시는 이

저물 듯 오시는 이 늘 섧은 눈빛이네. 엉겅퀴 풀어놓고 시름으로 지새는 밤은 봄벼랑 무너지는 소리 가슴 하나 깔리네. 한분순 (1943∼)- 심상(1976년 11월) 서정의 한 성취 아름다운 작품이다. 서정의 한 성취를 보여준다. 늘 섧은 눈빛으로 저물 듯 오시는 이. 시름으로 지새는 밤은 풀어놓은 엉겅퀴 같다. 얼마나 기가 막히면 가슴 하나 깔리는 봄벼랑 무너지는 소리겠는가? ‘거리두기’로 사람과 사람이 소원해지는 시대. 그래서 사람이 더욱 그립다. 이 시조는 행 구분을 이미지 전개에 따라 나누는 형태상의 과감한 변화를 꾀했다.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이런 시도는 그 뒤 많은 젊은 시인들이 따라 했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초정 김상옥 선생은 한 시인을 찾아와 찬사를 전하기도 했다. 언론인이기도 한 시인은..

좋은 기사 2020.09.04

기도

오른손과 왼손을 밀착시킨다. 공기 한 톨 들어갈 수 없게 완전히 밀착시킨다. 손에 쥔 게, 또 쥐려 하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신에게 보여드린다. 욕심 다 버렸음을 확인시켜드린 후, 욕심이 아닌 척하는 욕심 하나를 털어놓는다. 『사람사전』은 ‘기도’를 이렇게 풀었다. 기도는 어떻게 해달라고 비는 행위다. 세 글자로 표현하면 ‘주세요’가 기도다. 합격하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이 땅에 사랑과 평화를 주세요. 즉, 아주 경건한 표정으로 한껏 욕심을 부리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행위가 기도다. 신은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준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니 너도나도 성경 옆구리에 끼고 예배당을 찾는 거겠지. 그러나 아무리 너그러운 신도 모든 욕심을 다 들어주지는 않겠지. 쩨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에게..

좋은 기사 2020.08.27

바람은 다른데.

바람이 달라졌다 지난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간, 아파트 뒷 동에서 화재가 났다.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소방차가 오고 부산했지만 불꽃은 없었다. 날이 밝고 보니 에어컨 실외기 빗살문 대여섯 개가 탄 상태다. 아마도 실외기 빗살문을 닫은 채 에어컨을 오랫동안 가동한 게 아닌가 싶다 코로나 시대 방심이 부른 화근이 곳곳에서 살벌한 결과로 드러나고 있다. 너도 나도 할 말 많고 불만 많고 불안하고 불편한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진실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진실은 있을까. 백전백승은 적부터 알아야 가능하다는 데 알고 하는 건지 몰라서 용감한 건지 이도 저도 마뜩잖은 모습들 뿐이다. 바람은 가을 문턱으로 가고 있다. 마지막 곡식들은 영글어 가겠고 논도 밭도..

사람향기 2020.08.22

올여름 최고의 피서는

어디론가 멀리 가고 싶다고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하니 기다렸다는 듯 너도나도 공감의 반응을 보인다. 마음 맞는 이들과 미지의 곳으로 가보자는 모의는 공염불이라도 즐겁다. 올해는 여러 이유로 피서에 대한 열기가 실종되었지만 그래도 여름은 떠나야 제맛인 계절이다. 여름이 가기 전에 멀리 한번 다녀와 보면 어떨까. 저기 멀리 우주라면. 좁은 의미의 우주는 지구를 둘러싼 대기권 밖 지상 118㎞ 높이 이상의 공간이다. 멀리는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와 이웃한, 빛의 속도로 250만 년이 걸리는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가늠해볼 수 있으나 우주에는 1천억 개가 넘는 별을 가진 은하가 1천억 개도 넘게 있으니 넓은 의미에서 우주는 헤아릴 수 없다. 지상 400㎞ 높이는 어떨까. 그곳에는 시속 2만8천㎞의 속도로 90분마다..

좋은 기사 2020.08.12

생각

머릿속에 있는 것. 아직 꺼내지 않은 것. 그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꺼내서는 안 되는 것. 한 문장이 어렵다면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것이니 그곳에 그대로. 『사람 사전』은 ‘생각’을 이렇게 풀었다. 생각은 가능성이다. 머릿속을 유영할 때까지는 가능성이다. 김수영의 문장이 될 수도, 정태춘의 노랫말이 될 수도, 노무현의 연설이 될 수도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그러나 생각이 조급을 만나는 순간 가능성은 부서지고, 그 파편들은 설익은 형태로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입을 통해 나오는 그것을 말이라 하고, 손끝을 통해 나오는 그것을 글이라 한다. 조급에게 등 떠밀려 바깥세상으로 나오는 그것들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된다. 누구에게도 감흥을 주지 못하는 글이 된다. 글은 그나마 기회가..

사람향기 2020.07.22

'명예'를 생각할 시간

고인이 된 서울 시장과 백 장군 명예에 관한 화두 남기고 떠나 악다구니·정쟁 잠시 접어두고 명예와 품격 학습기회 삼아야 껌뻑이던 전구가 켜진 느낌이었다. 사람에겐 결국 이름만 남는다는 것. 죽음까지 함께 가는 것은 ‘명예’뿐이라는, 이렇게나 간명하고도 당연한 이치가 새삼 머릿속을 밝혔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고 백선엽 장군. 두 거물급 인사의 부고를 동시에 접하고서다. 한 사람은 인권변호사에서 서울시장이 된 정치인으로, 또 한 사람은 6·25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았던 그들. 살았을 때 영예로웠고, 현대사에 남긴 족적도 확실한 인물들이다. 하나 지난 주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전해진 두 분의 부고 앞에서 우리 사회는 또 한 번 쫙 갈라졌다. 사연이야 많지만 결국은 ‘명예’ 논란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좋은 기사 2020.07.19

맑은 복을 생각하며

물건들에 휩싸인 삶 돌아보게 돼 영혼을 받쳐주는 것은 무엇일까 맑은 가난과 신성한 삶이 아닐지 “제가 산중에서 혼자 지내면서도 기가 죽지 않고 나날이 새로워지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뒤에서 내 자신을 받쳐주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둘레에 무엇이 있는가.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출출하거나 무료해지려고 할 때 마시는 차가 있습니다. 딱딱하고 굳어지려는 삶에 탄력을 주는 음악이 있습니다. 내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이 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삶을 녹슬지 않게 받쳐주고 있는, 맑은 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법정 스님이 생전에 하신 법문이다. 요즘 나는 이 말씀을 틈나는 대로 거듭해서 들으면서 내가 가진 맑은 복에 대해 생..

좋은 기사 2020.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