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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감자

80년대 대구역 맞은편 교동시장에는 삶은 감자와 옥수수를 파는 리어카 좌판이 일렬종대로 늘어서 있었는데 종례시간 선생님 당부 뒤로하고 목적도 없이 시내를 배회했던 토요일 오후 분을 어찌냈는지 모락모락 뱃속 사정 때문인지 비쥬얼 갑이었던 삶은 감자 주머니엔 토큰뿐이고 한 번도 사 먹은적 없지만 한 번도 먹고 싶다는 생각은 안한적 없었던 어쩌다 감자꽃 볼 때마다 땅속 사정이 궁금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진데 자주 꽃 자주 감자 하얀 꽃 하얀 감자 보나 마나 최고인 삶은 감자! 내 젊은 날 일탈 때마다 결핍!이었던 삶은 감자 부대낄수록 분이 나는 사람과 삶은 감자를 먹고 싶다

my 수필 2020.07.05

삶은 감자

삶은 감자가 양푼에 하나 가득 담겨 있다 머리 깨끗이 깎고 입대하는 신병들 같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중이다 감자는 속속들이 익으려고 결심했다 으깨질 때 파열음을 내지 않으려고 찜통 속에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젓가락이 찌르면 입부터 똥구멍까지 내주고, 김치가 머리에 얹히면 빨간 모자처럼 덮어쓸 줄 알게 되었다 누구라도 입에 넣고 씹어봐라 삶은 감자는 소리지르지 않겠다고 각오한 지 오래다 ㅡ안도현

시와 수필 2020.06.23

`글 잘쓰는 법, 그딴 건 없지만` 문장으로 읽는 책

누군가가 말했다. 글을 쓰는 일은 인간 최후의 직업이라고. 사형수도 옥중에서 글을 써 책을 낸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독과 마주하기 위한 ‘도박’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삶의 방식의 문제다. 자신을 위해 쓰면 된다. 읽고 싶은 글을 쓰면 된다. 다나카 히로노부 『글 잘 쓰는 법, 그딴 건 없지만』 퀜틴 타란티노 감독도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타인의 평가나 인정 욕구, 혹은 유명해지기 위해 하는 창작이란 백전백패라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작가로 유명해지고 싶다는 사람을 자주 보는데, 긴 글을 쓰는 것은 노력에 비해 수지가 맞지 않는다. … 자신이 쓴 글을 읽고 기뻐하는 사람은 우선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카피라이..

좋은 기사 2020.06.16

불편 / 불평 / 불행

불편: 견딜 수 있는 것. 불평: 견딜 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 불행: 견딜 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이 견뎌야 하는 것. 『사람사전』은 ‘불편, 불평, 불행’ 세 단어를 이렇게 풀었다. 불편이 불행으로 번지는 과정을 이렇게 추적했다. 견딜 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면 결국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뎌야 한다고 말했다. 마스크는 불편하다. 춤과 노래로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는 불금도 불편하다. 예배당 밖에서 기도해야 하는 주말도 불편하다. 선생님이 모니터 속으로 들어간 풍경도 불편하고, 학생들이 주먹으로 악수하는 모습도 불편하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이런 낯선 불편을 강요했다. 우리는 견뎠다. 서로에게 박수를 보내며 잘 견뎠다. 불편이 곧 끝날 것처럼 보였다. 하루라도 더 빨리 불편에서 빠..

좋은 기사 2020.06.10

우두령 고개

3번 국도 김천에서 거창으로 가다 보면 경북 끝 마을과 경남 첫 마을 사이에는 우두령이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경상남북도를 가로지르는데 고개가 높아 그 능선에 서면 산을 등정한 것처럼 시야가 확 트인다. 특히 대덕면 쪽으로 보이는 뷰가 장관이다. 고갯길은 국도가 생긴 이래로 아직도 비포장이다. 엄마는 스물두 살에 이 고개를 넘어 경북 끝마을에서 경남 첫 면소재지 웅양면으로 시집을 왔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었을 때 방학이면 동생과 완행버스 타고 우두령 고개를 넘어 외갓집에 갔다. 아랫마을 모퉁이를 돌아오는 버스가 보이면 그때부터 두근대던 길. 아니 버스를 기다릴 때부터 설레던 길. 하얀 꼬리를 달고 버스가 우리 앞에 서면 동생을 책임지고 외가 마을 앞에 무사히 내려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차보다 더 흔..

my 수필 2020.05.19

윤사월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고 엿듣고 있다. ㅡ박목월 윤사월하면 젤 먼저 떠오르는 시다. 윤사월이 있는 해다. 옛부터 윤달에는 이야기 거리가 많았다고 한다. 윤달 태생은 팔자가 사납다거나 그 달에는 결혼을 피하거나 생일이 없는 해도 있으므로 양력으로 맞는다는 얘기도 있다. 반면 수의를 마련하면 좋다는 설도 있다. 자주 오지 않으니 장수를 기원하는 뜻이지 않았나 싶다. 사월은 생일이 들어있는 달이다. 작은아이가 어버이날에 묻는걸 무람없이 윤사월 인줄도 모르고 덜렁 한달 뒤를 알려 주었다. "야야, 낼모레가 니 생일인데 ..." 엄마만 기억하고 계셨다. 잘 지내느라 몰랐다고 날마다 생일같은 날들이니 건강만 하자며 통화를 마쳤다. 그렇게 ..

사람향기 2020.05.19

보리밥

쌀 한 톨도 귀했던 60년대 보릿고개에 첫 딸을 낳은 엄마 젖 뗀 어린것에게 보리밥을 먹이면 보리가 삭지 않고 그대로 나왔다 스무 살 적 부모님 열심히 일하면 보리밥은 면할 줄 알았기에 선 새벽부터 일하고 싶어 첫 닭 울기만을 기다렸다는데 일에도 허기가 졌을 리야 없을 터인데 내 일 끝나고 나면 얼른 큰집 농사일 도와 드리러 갔다 저녁이 해결되어 그게 좋았다고 이런 세상 올 줄 몰랐다고 이보다 좋은 세상없다면서도 아직도 나만 보면 보리 똥 얘기다 쌀 한 됫박만 있었어도... 지천명 지난 딸을 두고도 부모님 가슴속에는 아직도 소화시키지 못한 보리밥이 있다

my 수필 2020.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