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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 ㅡ 카페 무명유실

식사자리 만들어 보겠다던 작은아들이 정해준 장소는 삿뽀로 대구반월점이었다. 반월당은 70년 대 후반 부모님이 논 팔고 집 팔아서 고향을 등지고 이사 온 대구의 첫 집 근처이기도 하다. 열네 살 사춘기로 넘어 갈듯 말듯한 시절이었다. 시골서만 살다가 전학 와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하늘도 안 보이는 마당 없는 집에는 정이 안 갔고, 논과 들판과 산만 보이던 고향에서 집 앞으로 차들이 지나다니는 걸 보는것도 신기했다. 고향 동무들 생각만 났고 방학만 기다렸다. 추억도 더듬을 겸 두어 시간 전에 출발했다. 옛 건물들은 남은 게 거의 없었다. 휘어가고 굽어가기도 하는 길을 기준으로 집터를 찾아야 했다. 이 골목인가 저 골목인가 싶은데, 엄마는 반대편 집을 기준으로 옛집터를 찾아냈다. 그 터에는 멋지고 예쁜 건..

사람향기 2023.02.10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

유학생 윤동주가 남몰래 시집 출간을 준비합니다. 깊은 죄책과 자괴가 시로 흐릅니다.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와 허영의 천공(天空)에다… 무너질 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부끄러움의 시인', 윤동주를 일컫는 말입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그런 윤동주에게 시인 정지용이 말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부끄러운 걸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 거지" 마크 트웨인은 '인간만이 얼굴이 붉어지는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수치심과 죄의식은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마음의 기둥입니다. 부끄러움이란, 자존을 지키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고요. 시인이 사람은 왜 사슴처럼 우아한 뿔이 없을까 생각합니다. "있지, 더러는 엉..

좋은 기사 2023.02.07

요가원 식구들

케이크를 들고 온 그녀는 촛불만 끄고 갔다 학생들이 마련해 준 것 같은데 요가원 식구들이 더 신났다 어디로 향하든 선의의 보폭에는 근원처럼 샘솟는 기쁨이 있다 내가 내 안에서 좋아하는 마음을 꽃피우고 그 열매를 나누는 일 누구든 이해관계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은데 마음이 먼저 마중 나갈 때가 있다 몸도 맘도 살찌는 일 맛있는 걸 함께 나누는 일이기도 한데 내가 다니는 요가원에는 나처럼 젯밥에 관심 있는 이가 많아 근육처럼 늘어가는 식구들이 있다

사람향기 2023.02.02

우화의 강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

시와 수필 2023.02.01

마음혁명 / 김형효

마음이 욕망의 기라면, 기는 에너지로서 불멸이다. 인생은 거의 무의식적인 기의 습관에 따라 움직인다. 이것을 우리는 습기(習氣)라고 부른다. 즉 무의식의 욕망이 습기다. 무의식은 땅속에 박혀 있는 의식의 뿌리에 해당하므로 의식은 무의식의 습기에 영향을 받아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한다. 무의식의 습기를 바꾸지 않고서는 아무리 의식의 문제점을 이야기해 봐야 당위론으로 끝나고 만다. 나의 인생은 결국 나의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실존적 생각과, 순간은 삶과 죽음의 양면성이 공존하는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살면서 다른 한편으로 죽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죽음을 응시함이 인간을 소유론적 습기의 속물근성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게 된다. p51 ㅡ김형효 철학산책 * 마음혁명 중에서 * * 마음혁명은..

책향기 2023.01.28

설명절을 지나며

주인은 가고 없는데 전갈 한 마리와 로봇 장난감 하나가 남았다 살가운 스카프와 승진했으니 작년보다 십만 원 더라는 봉투도 남았다 세배를 하고 나면 호박잎처럼 손 벌리던 아들이 장가를 가고 아들을 낳고 아들의 아들이 세배를 한다 세뱃돈 받던 조카들도 직장인이 되어 이제는 용돈을 준다 어느 세월에 여기까지 왔는지....... 모두들 제 자리로 돌아간 명절 끝이다

사람향기 2023.01.24

마음이 한 일

설 연휴를 하루 앞둔 조회 시간 혼자 사는 총각이 내놓은 간식에 꼬지 전이 올라왔다 다들 명절이라 사 온 거라 여겼는데 지난밤 장 보는 일부터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키 맞추고, 줄 세우고, 색동옷 입혀 이 자리까지 과정도 함께였다 이제야 명절 전날에 전을 만드는 이유를 알았다고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알아주면 그 마음이 따뜻해지기 마련이니 역지사지 꼬지 슬기로운 사회생활이다 '어머니가 이걸 보면 짠할 거 같아요'라는 톡을 엄마보다 한 살 위인 직원에게서 받았다고 직원 대하듯 공손해진 아들이 왔다 명절 스토리가 하나 더 생겼다 23 년 설 풍경 중에

사람향기 2023.01.22

최진석 - 북토크에 다녀오다

** 구미는 처음이라는 교수님, 공단도시로만 알고 있었는데 삼일문고에 와 보니 서점이 아니라 문화공간 같다며 소회를 밝히셨다. 인상적이었던 말씀 올려본다 불안은 품는 것이다, 내공을 키워라 누구나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일반 명사는 존재하지 앓는다 사랑, 아버지 고유명사만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도 사랑하자고 마음먹을 때까지만 사랑이고 이후는 사랑의 관념을 생각하고 그것을 집행하려고 한다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은 하나다 ㅡ'정신만 빛날 수도 있지만'을 전제로 정신과 물질은 궤를 같이 한다는 말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다만, 가난한 경우일 수 있다고.. 죽음은 없고 죽어가는 상태가 있을 뿐이다. 하루키 ㅡ 토양에서 승화된 주제를 잘 표현했다 모옌 ㅡ그의 문제를 보편적으로 승화시킨 사람. 이 ..

책향기 2023.01.19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

**강의가 워낙 인상적인 최진석 교수님이 구미에 오신다. 지난 12월에 초판발행된 이 책으로 북토크가 삼일문고에서 열린다. 책을 읽어가면서 드는 생각은 힘을 이렇게 뺄 수가 있는가 싶게 편했다. 강한 어조, 정확한 발음에만 익숙했던 말씨와는 달랐다. 말보다 문장이 더 매력적인 작가들에 비하면 의외였다. 잘 읽혔다. 몰입하기에 좋았다. 옮겨두고 되새기고 싶은 문장들만 스토리에 올려본다. 사흘 후 강연에선 어떤 인상, 어떤 낯섦으로 생산자가 되어주실지. 나는 또 어떤 생산으로 연결되고 연계될지 기다려진다. 각설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2부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로 자유로운 단계는 없는 것을 꿈꾸는 단계이다. 없는 것을 꿈꿀 때 인간은 도전, 용기, 모험적인 활동을 한다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들어도 사람마..

책향기 2023.01.14